아름다운 詩, 글

문태준 /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중에서

송담(松潭) 2019. 6. 26. 14:56

여름날과

별 가득한 수박

 

 

 

 

 여름에 관한 많은 시들이 있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인 바쇼는 "장맛비 내려 학의 다리가 짧아졌다"라고 썼다. 장맛비에 여울의 물이 불어 여울에 서 있는 학의 다리가 그만큼 짧아 보인다고 쓴 것이다. 요시와케 다이로는 "여름풀이여, 꽃을 피운 것들의 애틋함이여!"라고 노래했고, 무라카미 기조는 "여름풀 위에 고치를 만들고 죽는 풀벌레"라고 써 여름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흥취를 시로 풀어썼다.

 

 여름이 되어 숲은 빼곡하게 들어찼다. 나뭇잎들은 윤기로 빛난다. 붉게 익은 과일은 쏟아진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가운데 <수박을 기리는 노래>가 있다. 파블로 네루다는 이 시에서 여름날의 수박을 "여름의 초록고래" "물의 보석상자" "흩어져 있는 루비" 등에 비유하며 "별가득한 수박을" 먹고 싶다고 노래한다. 여름 과일의 여왕으로 수박을 손꼽은 참으로 멋진 노래가 아닐까 한다.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겁다

 

 여름의 명물로 매미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매미는 짝을 찾기 위해서 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매미가 우는 데에는 순서가 있다고도 한다. 참매미가 울면 유지매미나 쓰름매미 등은 울 차례를 가만히 기다린다. 이 이유인즉 짝을 찾는 소리가 다른 매미의 울음소리와 뒤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성충이 되기까지 7년 동안 땅속 생활을 한 후에 여름 낮밤에 2주일 정도를 울고 간다는 여름 매미. 여름매미가 열정적으로 우는 이유를 잘 알 것 같다.

 

 그래서 안도현 시인은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라 칭송했고, 박영근 시인 또한 "온살을 부벼" 우는 한 생명이 갖고 있는 절정의 시간에 대해 예찬했던 것이다.

 

 여름 낮밤 천지에 매미 소리는 가득하다. 목피(木皮)에 앉아 우는 매미 소리가 염천을 뒤흔든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매미는 아주 몸이 작지만 배포가 무척 크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천공(天空)에 오로지 매미의 울음뿐이다.

 

 매미가 다 울고 가면 여름도 지나갈 것이다. 매미가 다 울고 가면 여름 우레도 소낙비도 삼복더위도 지나갈 것이다. 맹렬한 의욕 하나가 심중(心中)을 좌우로 앞뒤로 상하로 통째로 흔들어놓고 지나갈 것이다.

 

  

여럿의 꽃들이

꽃다발을 이루듯이

 

 한 알의 대추가 익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의 도움이 필요할까?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통해 한 알의 대추가 붉어지는 데에도 태풍과 천둥과 벼락과 무서리와 땡별과 초승달의 도움을 받는다고 말한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 "저 혼자 둥글어질 리도 없다는 것이다.

 

 한 톨의 쌀을 얻는 과정이나 딸기, 모과 등의 과일을 얻는 과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의 성숙, 하나의 완성 뒤에는 협력적 조력자들이 있다. 가령 산의 산빛이 연두로 번지는 데에는 모든 수종의 나무, 덤불, 풀 들이 새 잎을 냈기 때문이다. 이 부조는 은밀하지만 어긋남이 없이 이뤄지고 있다.

 

 가족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밥상 공동체라는 말이 있듯이 식구들은 하나의 둘레를 이루어 서로를 마주보고 서로를 거든다. 눈물의 골짜기에 살 때에도 기쁨의 나라에 살 때에도 가족들은 서로 섞이고 함께 움직인다. 식구 가운데 한 사람의 표정, 목소리, 작은 동작의 변화는 다른 식구들에게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동네의 경우도 역시 이러하다. 서로의 일에 손을 보태고, 걱정을 나누어서 줄여주고, 함께 기뻐해 경사스러운 시간을 더 늘린다.

 

 한 단의 꽃다발이 여기에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꽃묶음은 여럿의 꽃을 줄기째나 가지째로 모아 묶은 것이다. 개별적인 주체로서의 우리 또한 꽃다발에 속해 있는, 꽃다발을 이루는 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각각의 빛깔과 향기가 온전하게 보호받는 꽃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꽃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 세계는 가장 환하고 멋진 꽃다발이 될 것이다.

 누군들 그 환하고 멋진 꽃다발을 받아 안고 싶지 않겠는가.

 

 

마음이 죽은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

 

 

 생명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저 자신을 뒤집을 줄 안다. 스스로 고유하고 존엄하며 스스로 역동적으로 변화할 줄 안다. 백담사 만해마을에 머무는 동안 가까이에서 본 여름의 생명 세계 또한 그러했다. 흐르는 물, 완강하게 버티고 앉은 바위, 익어가는 옥수수, 중천을 이착륙하는 잠자리, 차오르는 달, 사방으로 세력을 뻗어가는 풀밭, 테두리가 높게 커지는 여름산이 그러했다. 생명 세계는 스스로 유신(維新)하는 힘을 갖추고 있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글을 읽으며 며칠을 보냈다. 시집 님의 침묵첫머리에는 사족이라는 뜻으로 겸손하게 표현하여 붙인 <군말>이 있다. "<>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엄혹했던 식민지 시대에 쓴 이 명문에는 못 생명의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절절한 마음이 녹아 있다. 이번 독서에서 나를 호되게 매질한 것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1910128일에 완성한 <조선불교유신론>이었다. 이 글에는 불교 유신의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알려진 대로 수행자의 결혼을 자유의사에 맡길 것, 깊은 산속에 있는 절을 도회지로 옮길 것, 각종 의식을 간략하게 할 것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종단과 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쇄신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나를 크게 경책한 문장들은 세속의 인심(人心)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었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고요히 가졌는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갖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반 넘게 황금을 경쟁하는 힘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다."

이러한 문장들을 읽는 순간 나는 쉽게 움직이고, 어지럽고, 어둡고, 물질에 현혹되는 내 마음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장들보다 나를 바싹 옥죄어 아프게 한것은 '방관자'를 꾸짖은 대목에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고 더러워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방관자보다 더한 것이 없을 것"이라면서 방관자들을 호통쳤다.

 

 방관자에는 여섯 부류가 있다고 했다. 혼돈(混沌), 위아(爲我), 오호(嗚呼), 소매(笑罵), 포기(抛棄), 대시(待時)파가 그 무리라고 했다. 혼돈(混沌)파는 세사에 까맣게 어두워 먹고 잠자는 일에만 골몰하는 무리요, 위아(爲我)파는 "벼락이 쳐도 편히 앉아서 보따리를 찾는" 무리요, 오호(嗚呼)파는 탄식을 일삼는 무리요, 소매(笑罵)파는 배후에서 욕설하고 남을 비방하는 무리요, 포기(抛棄)파는 남에게 기대하고 자신에게는 의지하지 않는 무리요, 대시파(待時)"스스로 방관자가 아니라고 하는" 무리라는 것이다. 세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하는 세태를 이처럼 세세하게 나누어서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게 나무라는 말씀에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독립의 서첫 문장을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라고 썼다. 생명세계는 스스로 독립을 부르짖고, 스스로 혁신한다. 그러나 생명세계의 본래 성품과 질서를 온전히 보호하는 일은 조금만 상관해도 어렵게 되고 만다. 혹여 소매에 손을 찌른 채 이 일을 방관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함께 돌아볼 일이다.

 

 

조용하고

슬픈 자세

 

나목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작고한 이형기 시인이 생전에 쓴 시 <나무>를 읽는다.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소란한 마을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 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

 

 우리의 일상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존재들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무'가 아닐까 한다. 나무는 새잎이 돋고, 신록이 상방으로 번지고, 푸른 그늘을 하방에 펼치고, 여러 색채로 세상을 곱게 단장하고, 그 모든 잎을 차차 떨구어 나목이 된다. 이 운행은, 이 나무의 삶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다. 나무의 외양이 계절마다 바뀌지만 나무의 내적인 성품은 일상(一上一下)일하지 않는다. 우물 속 두레박이나 대양 속 파도처럼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는다.

 

 나무의 성품은 고요하고 견고하고 동요가 없다. 육중한 바위처럼, 무너지지 않는 산처럼. 그런 마음으로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조용하고 슬픈 자세'란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세속과 세사는 소란하기 그지없지만 나무는 그것에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롭다. 그러나 외로운 가운데서도 나무는 조용하다. 외로운 시간을 나무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무의 미덕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악함이 생겨나지 않고, 잘못되는 것 또한 없다. 이 시에서처럼 나무는 고독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내고 포용력을 갖추었으며 게다가 의연하다. 천년만년 흘러가는 것을 그치지 않는 강물처럼 일관하여 살 뿐이다.

 

 한 시인이 나무에 대해 노래한 대목을 언젠가 적어둔 적이 있다. 시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메모에는 이런 시구가 적혀 있었다. “나무를 안으니 내 몸속에 수액이 흐른다. (..) 잎이 무성하니 갈 길 바쁜 바람도 쉬었다 간다. 나무가 시원하니 나도 시원하고 나무에 힘이 솟으니 내 몸속 피도 잘 돌아

 

 겨울이 깊어지면서 나목을 바라보는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이 일 저 일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한 그루 나목을 바라보았던 것인데, 그 후로 문득문득 나목을 바라보았다. 그 시간은 내게 아주 조용한 때였다. 마치 잠깐 숨을 고를 때처럼. 그 어떤 글씨도 없는 백지의 시간처럼.

 

 나목은 군더더기가 없다. 나목은 깔끔하다. 나목은 말의 수효를 줄였다. 나목은 변명이 없다. 나목은 밋밋해도 자꾸 눈이 간다. 나목은 맑고 시원한 샘물을 떠놓은 그릇 같다. 나목은 담백하다. 나목은 고요하되 자유로워져 있다. 나목은 스스로를 잘 조절한다. 나목은 스스로의 욕망과 감각을 정복했다. 나목은 난야에 사는 수행자 같다. 나목은 화려한 것을 버렸고, 욕심이 적고, 말과 글자의 수식(修飾)을 즐기지 않는다. 나목은 침묵에 집중한다.

 

 나목을 바라보는 시간을 겨울에 가져볼 일이다. 우리가 행한 모든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마음의 심층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행동을 하려 할 때 제약을 가한다고 한다. 그것을 마음에 남은 '습기'라고 한다. 그리고 그 습기를 주축으로 해서 온갖 것이 생겨난다고 한다. 나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의 저 깊은 곳에 남아 있던 습기들이 사라지는 것 같다. 습기가 마르는 것 같다. 그래서 점점 자유로워진다. 후련해진다.

 

 문태준 /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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