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해마다 해가 간다

송담(松潭) 2019. 6. 16. 20:52

 

해마다 해가 간다

 

 

 

 

 연말에 소년 시절의 친구들 몇 명이 녹두전 파는 식당에 모여서 송년의 자리를 가졌다. 송년회라고 하지만, 송구(送舊)도 영신(迎新)도 말처럼 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세월의 허망함을 이기지 못해 모여서 술 마시고 시시덕거리는 자리였다. 모인 친구들은 다들 70살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다들 얼굴이 쭈그러들었고, 머리털에 먼지가 낀 듯했고, 눈동자에 쏘는 힘이 빠져서 헐렁해 보였다.

 

 - 이젠 술도 다부지게 못 먹네. 앞으로는 모이면 우유로 하자. 사이다로 하든지.

 

 - 늙기가 너무 힘들다. 삭신 108마디가 쑤셔. 한꺼번에 팍 늙어버리면 좋을 텐데, 찔끔찔끔 늙으니까 더 힘들어.

 

 - 난 그래도 사는 게 좋다. 살아 있어야 손흥민이 공차는 것도 보고 녹두전도 먹잖냐.

 

 - 맞아. 늙기가 힘들어도 사는 게 그래도 좋아. 죽을 날짜를 모르니까 살 수가 있는 거야. 넌 몇년 몇월 며칠에 끝난다, 이렇게 정해져 있다면 죽기보다 살기가 더 무섭지 않겠냐. 모르니까 사는 거야.

 

이런 허접하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판이 시작되었다. 술이 두어 잔 들어가자 우리는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살았을 적 놀던 꼴을 이야기했고, 그 처자식들의 안부를 물었다. 우리는 치매가 와서 요양병원에 들어간 친구의 양태를 이야기했다. 문병 다녀온 친구가 말하기를, 치매환자들이 모여서 점심 먹는 자리를 보았는데, 지옥이 따로 없었고 무섭고 슬퍼서 눈물이 났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 너네들은 문병 가지 마라. 그 꼴을 보면 늙기가 더 힘들어진다.

 라고 말했다. 한동안 다들 말이 없었다.

 

 한 친구는 손자가 두 돌인데, 뽀뽀를 해주면 더 많은 뽀뽀로 갚아준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가 말했다. , 한평생 술 먹고 욕하고 거짓말한 그 더러운 입으로 애한테 뽀뽀하지 마. 애한테 균 옮긴다. 애엄마가 싫어할걸.

 

 다들 낄낄 웃으며 한잔씩 마셨다. 우리는 암, 당뇨, 고혈압. 불면증,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친구들과 유방암, 자궁암 수술을 한 그 부인들의 중상을 이야기했고, 어느 병원 의사가 용한지 이야기했다. 우리는 70이 가까운 나이에 바람피우다 들통나서 이혼한 친구를 욕했고, 그 친구의 애인을 욕했고, 다 늙어서 이런 걸 못 참아서 이혼하자고 들이댄 그 부인을 욕했는데, 어떤 친구는 바람피운 친구를 부러워했다.

 

 - , 간통죄가 없어졌으니까 개는 좀 늦기는 했지만 헌법의 덕을 많이 본 거야.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소주잔을 때려붙이면서 말했다.

 

 - 간통죄가 위헌이라고 결정난 것이 20152월이었는데, 그날 저녁에 술집에 갔더니 젊은것들이 모여서 우리나라가 비로소 문명한 단계로 진입했다고 마구 떠들어대더군. 그때 우리 또래는 이미 칠십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놈의 악법 때문에 평생 운신을 못하고 살아왔는데 법이 폐지된 후에는 다 늙어서 우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다. 보상도 안 해주고.

 

 다들 낄낄낄 웃으며 한 잔씩 마셨다. 말은 뒤죽박죽으로 엉켰고, 이쪽저쪽에서 다른 화제로 떠들어댔다. 티셔츠 공장 하던 친구가 또 물었다.

 

 - 늙으니까 살껍질이 푸석푸석해지고 껍질이 부스러저서 가루가 떨어지는데 왜 그런 거냐?

 

 나는 그건 잘 모르겠고, 동의보감을 좀 더 들여다보고 내년 송년회 때 대답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물을 억지로 알려고 덤비는 것이야말로 큰 병의 원인이 된다. 라는 동의보감의 말씀을 전했다. 다들 낄낄낄 웃었다. 종합상사 주재원 하던 친구가 어디서 구했는지 달력을 한 개씩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잔을 들어서 또 한잔씩 마셨다. 총무가 회비를 걷었다. 다들 3만 원씩 냈다.

 

 저녁 6시에 시작했는데, 오래 버티지 못했다. 8시가 넘으니까 다들 마누라한테서 전화받고, 9시에 흩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어둠 속에서 가슴이 뻥 뚫린 듯이 허전했다.

 

 당신들은 이 송년회가 후지고 허접하다고 생각하겠지.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덧없는 것으로 덧없는 것을 위로하면서, 나는 견딜 만했다. 후져서 편안했다. 내년의 송년회도 오늘과 같을 것이다. 해마다 해가 간다.

 

 김훈 / ‘연필로 쓰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