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막장
이국종은 중증외상환자 수술방을 '막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수술방은 어둡고 긴 복도 끝에 있다. 생업의 현장에서 추락하거나 깔려서 몸이 으깨진 사람들, 사고나 범죄피해자들, 훈련중에 부상당한 군인들이 '막장'으로 실려온다. 헬리콥터는 막장에서 다친 사람들을 싣고 막장으로 날아온다.
막장은 갱도의 맨 끝이다. 한자로는 채벽(採壁)이라고 하는데, 곡괭이로 벽을 찍어서 석탄을 캐내는 자리라는 뜻이다. 막장은 생산의 최전방이다. 막장꾼이 곡괭이로 찍어낸 만큼만 갱도 밖으로 나갈 수가 있고, 그가 찍어낸 만큼만 갱도는 전진한다.
생산은 원초적으로 막장에서 이루어진다. 막장은 무의미한 암흑의 수억 년에 잠겨 있던 지하 심층부의 검은 벽을 곡괭이로 찍어서 그 조각들을 인간의 삶 속으로 끌어넣는데, 그 노동의 질감은 막장꾼의 근육에 각인된다.
난잡한 욕망들의 충돌을 보여주는 TV드라마나 권모술수와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정치판을 '막장'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무런 생산이 없고 생산에 가해지는 근육의 작동이 없으므로, 이것은 결코 막장이 아니다. 이것은, 남을 막장으로 밀어넣고 자신은 갱도 밖으로 달아나려는 난장판이다.
이국종의 막장에서 생사는 명멸한다. 이국종은 으깨진 환자의 몸을 칼로 열고, 몸속 장기들의 가장 깊숙한 막장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생명은 기름 떨어진 램프의 희미한 불빛처럼 가물거리고 있는데, 이국종은 그 불씨를 살려내거나, 살려내지 못한다. 그는 그 막장에서 생명의 삶과 죽음에 대한 명석한 인식에 도달한다.
중환자실에 누운 환자가 의식이 없어도 그 몸이 스스로 살고자 애쓰고 있음을 느낄 때 나는 놀랍고도 안쓰리웠다. (1권 328~329쪽)
라고 그는 썼다. 이 놀라움과 안쓰러움이 그를 막장에 붙잡아놓는 가장 큰 힘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 힘에 포획되어서, 막장을 둘러싼 인간과 제도를 혐오하면서도 막장을 떠나지 못한다. 그런데 '스스로 살고자 애쓰던' 이 환자는 고난도 수술 끝에 죽었다.
자동차에 치여서 머리와 내장이 부서진 아이가 이국종의 막장에 실려와서 '가망 없는 수술'을 마치고 죽었다. 이종국은 죽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더니
열려 있는 아이의 눈동자는 맑았다. 생명이 떠난 후에 빛이 마치 호수처럼 맑아서 나는 시선을 오래 두지 못했다. (…) 간호사가 아이의 눈을 덮었으나 아이의 열린 눈동자는 내 눈에 선명하게 남았다. (1권 433쪽)
생명이 떠나고 나서도 생명의 흔적은 당분간 육신의 표정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아마도 이 동안은 매우 짧을 것이다. 이 짧은 동안의 생명의 잔영도 그를 막장에 붙잡아 놓는 힘일 터이다.
이국종의 저서 『골든아워』 두 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그의 후배이며 동료의사인 정경원이 나오는 페이지다. 정경원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육군보병 사단에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이국종을 찾아와서 제대 후에 외상센터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고 자원했다. 정경원은 이국종 밑에서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환자를 살려냈다.(2권 363쪽)
정경원은 이국종의 막장을 함께 지켜왔다. 지금 이국종의 왼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다. "눈 때문에 생긴 내 공백을 정경원이 몸을 던져 꾸역꾸역 메워나갔다" (2권 160쪽)
고 이국종은 썼다.
이국종은 병원의 상부조직이나 정부관료들과 수없이 부딪치면서 적들을 만들어왔다. 사람들은 '막장'을 외면했고, 없애지도 못했고, 막장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힘들어했고, 다만 막장이 조용하기만을 바랐다. 그는 수없이 절망하고 좌절했고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 나는 정경원이 서 있는 한 버텨갈 것이다. '정경원이 중증의상의료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 (…) 그때를 위해서 하는 데까지는 해보아야 한다.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한다...... 거기가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2권 313쪽)
이것이 「골든아워」의지막 대목이다. 나는 이 책에서이 페이지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막장의 우정과 헌신, 희망과 미래는 그야말로 막장다워서 눈물겹지만, 그신뢰는 탄탄해 보인다.
이국종은 이 책에 '정경원에게'라는 현사를 붙였다. 정경원은 이 책을 받아야 안다. 미래의 정경원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김훈 / ‘연필로 쓰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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