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
서른을 갓 넘은 나이에 요절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는 가곡의 왕이라 불립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곡은 시인 빌헬름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24곡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이겠지요. 독일어 제목은 Winterreise, '겨울 여행'이란 뜻이지만 귀에 익은 ‘겨울 나그네’란 제목도 나름 이유는 있습니다. 이 곡에서 말하는 겨울 여행이 낭만적이고 유쾌한 기분 전환의 여행길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로 왔다가 낯선 이로 간다네’로 시작되는 이 연가곡은 마침내 지쳐 쓰러져 죽는 순간을 예감처럼 머리에 담고 걷고 또 걷는 사랑을 잃은 외롭고 쓸쓸하며 가난한 한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더없이 절절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간간이 작은 희망의 조짐이 보였다가는 다시금 사라져가는 여행의 끝에서 주인공은 처량한 노인 악사를 만납니다. <겨울 나그네>의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입니다.
저편 마을 한구석에 / 거리의 악사가 서 있네 /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 손풍금을 빙빙 돌리네. // 맨발로 얼음 위에 서서 / 이리저리 몸을 흔들지만 / 그의 조금만 접시는 / 언제나 텅 비어 있어. // 아무도 들어줄 이 없고./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네. / 개들만 그 늙은이 주위를 빙빙 돌며 / 으르렁거리고 있네. // 그래도 그는 모든 것을 / 되는대로 내버려두고 / 손풍금을 돌린다네, 그의 악기는 / 절대 멈추지 않는다네.
가끔 이렇게 우울하고 절망적인 곡을 왜 들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기에 싸구려 감상이 아닌 가장 깊고 심오한 차원의 연민으로 다가가는 문이 있기 때문이라는 답을 얻게 됩니다. 슈베르트는 <거리의 악사>에서 마을 어귀에 맨발로 서서 곱은 손으로 손풍금을 돌리는 늙은 악사 앞의 접시는 텅 비어 있고,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노래합니다. 그는 그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추위에 곱은 손과 외로움에 얼어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스스로 그런 벌거벗은 마음이 되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과 절망으로 노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예술을 통해 연민과 자비의 문을 열 기회를 얻습니다. 차가운 겨울 풍경 속 한 모퉁이에 서서 온기를 애타게 찾는 이웃들의 얼어붙은 몸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차갑게 얼어버린 마음에 눈물도 잊은 지 오래인 이웃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이제 눈이라도 소담스레 내려 냉랭한 마음이 생기를 얻었으면 싶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시간이 오면 좋겠습니다, 겨울날, 주일미사를 마치고 성당 문을 나서는 나의 눈길이 거리의 악사에게 향하고 있는지 가만히 살펴봅니다.
최대환 /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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