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에 대하여
인간관관계에서 상대를 어떻게 불러주는가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물론 직장에서는 직책에 따라 호칭을 하지만 특별한 직책이 없는 사람도 비공식적인 호칭을 정하여 불러주면 기분이 좋아지고 사기가 올라간다. 나는 낙향 후 바뀐 직장에서 일반 직원이라도 나이가 많거나 조직에 비중 있는 직원에 대해서는 직책에 상관없이 팀장, 실장 같은 비공식 명칭을 만들어서 직원들이 그렇게 부르도록 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고 공식 직책을 가지고 있는 일부 간부급 직원들은 자신의 소속하에 있는 하급 직원이 자신과 같은 명칭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은근히 불만을 갖기도 했다. 나의 이러한 선견지명(?)은 한참 후에 공직사회 전반에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계장, 과장의 보직이 아닌 일반직원들을 ‘주무관’으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김주사’, ‘이주사’란 호칭은 사라지고 모든 공무원들이 ‘관(官)’이 되었으니 역시 공무원들 머리는 좋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호칭에 대해 실수한 적이 있다. 광양매실로 유명한 홍쌍리 여사를 처음 만나 ‘홍쌍리 사장님’이라고 불렀는데 틀린 호칭이었다. 사장보다 더 높은 회장님이셨고 사장은 아들의 직책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자신을 홍쌍리 ‘명인(名人)’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고 주변에서 귀뜸해 주었다. 요즘은 사장이라는 호칭이 너무 흔하니 어지간한 기업체를 소유경영하신 분들에게는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트랜드다.
은행창구에서 여직원이 한 50대 남성한테 '아버님'이라고 불렀더니, “내가 그렇게 늙게 보이느냐? 기분 나쁘다.”고 항의를 해서 그 후로 직원들은 ‘아버님, 어머님’호칭을 ‘고객님’으로 바꿨다고 한다.
재직시절, 언젠가 화난 고객과 통화로 싸우다시피 하다가 “선생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하고 갑자기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더니 그분이 화를 누그러뜨리면서 웃고 해피엔딩한 경험이 있다.
전원에 와서도 호칭은 중요했다. 앞집에 사신 분을 ‘0사장님’이라고 불렀는데 ‘0회장님’을 더 선호하신 것 같았다. 실제 우리 마을 ‘노인회장님’이시기 때문이다. 또 마을 이장님도 ‘0회장님’으로 불러드리는 게 더 나을 성 싶었다. 그분은 ‘이장협의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장동료들 간에는 회장님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看過)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네 할머니들이 아직도 “최샌”, “박샌”하고 부르는데 영 촌스러워보였다.
좋은 호칭은 돈 들이지 않고 인간관계를 좋게 한다. 상대의 마음속에 꽃을 피게 하는 것이 호칭이다. 집사람도 지인들에게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자주 쓴다. 이점에서는 나와 많이 닮았다. 그런데 오늘 아주 생소한 호칭을 들었다. 전원에 살다보니 ‘보안업체’를 이용하고 있는데 문의사항이 있어 전화를 했더니 그곳 직원이 나에게 생뚱맞게 ‘대표님’이라고 불렀다. 나의 전직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이 친구들이 왜 이런 호칭을 부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짐작컨대 호칭의 진화(進化)인 것 같다. 사장, 회장보다 더 고급스런 품질, '대표'님! 서비스의 첨단을 달리는 대기업이 착안한 절묘한 호칭이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순천시 상사면 미곡길 ‘0’번지 세대주로서 우리 집 ‘대표’가 확실하지 않는가!
(201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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