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전라도 편견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송담(松潭) 2017. 12. 7. 14:35

전라도 편견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내가 처음 전라도 편견의 파편을 맞은 것은 경상도에서 군대생활 3년을 하던 중에 어떤 주민으로부터 들었던 얘기. “전라도 사람 같지 않다”였다. 전라도 사람은 뭔가 문제있다는 인식의 보편화! 이건 나에게 아픈 상처가 되었다. 그 후 서울에서 12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장의 요직에 있는 상사들은 거의 경상도 사람으로 포진되어 있었고 (그러나 경상도 동료들과는 인간적으로 전혀 거부감 없이 친하게 지냈다.) 어쩌다 술집에 가면 웨이터들 상당수가 전라도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했던 것을 보면서 비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고착화되고 왜곡된 편견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역사성을 찾아보았다. 물론 나의 짧은 실력이고 편견이며 정확한 근거가 없는 추론이다. 먼저,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차령 이남의 땅은 인재로 등용하지 말라’는 것의 진의와 배경을 찾아본다. 왕건이 후백제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나라를 그대로 받친 통일신라의 경순왕과는 달리 견훤의 후백제 지역에서는 가장 끈질긴 저항을 받았다. 이것은 나중에 고려왕조가 저항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여 배역지로 지목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공감한다. 전라도 지역이 풍수지리학적으로 배역지라기보다는 왕권유지를 위한 편견이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이다.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는 정신은 덮어지고 배역지라는 편견이 역사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물론 훈요십조의 사후 조작 왜곡설이 있기도 하다)

 

다음은 전라도 지역이 왜 저항하는 지역으로 대표되는가. 호남은 평야지역이 많다. 농경사회에서는 경작지로부터 모든 부(富)가 나오는데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는 지주와 소작농의 갈등이 다른 지역에서보다 더 불가피하다. 한 번 지주는 평생 지주이고 한 번 소작인은 평생 소작농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 때문이다. 원래 소작인은 수확량의 절반을  받는 게 원칙이지만 이는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춘궁기에는 지주가 소작인을 수탈하는 구조가 일반화되었으며 거기에 탐관오리들의 수탈까지 더해지니 민초들의 핍박한 생활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모양 그 꼴이다. 동학혁명이 왜 일어났는가? 오직하면 죽창을 들고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이슬처럼 스러져갔겠는가. 동학혁명의 진압은 외세에 힘을 빌린 무기력한 국가, 조선이 만든 참극이었다.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농민의 후손들은  그후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고통과 질곡의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다음은 전라도 사람들이 삐딱하다는 편견에 대해서다. 가난한 농촌에서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서울로 튀어 구로공단으로 간, 전라도 청년이 있었다고 가정하자. 이 청년이 어느 날 라면에 쐬주 몇 잔으로 시름을 달래고 있는데 옆자리의 경상도 출신 청년 학생이 함께한 여대생과 레포트가 어쩌니 하면서 웃어댔다. 이를 지켜보던 술 취한 전라도 청년은 “에이, 씨발놈들!”하고 술상을 엎어버린다. 그 시대는 똑같은 농토를 가진 농부라도 개발이익을 향유하는 경상도 농부 자식은 서울로 유학가 신분상승이 되고 전라도 농부 자식은 개발이익의 수혜를 받지 못하고 공돌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경제 구조였다. 세상은 공돌이의 고달픈 삶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해 보지 않고, 술집에서 실수로 갱판을 논 서러운 청년만을 못된 놈으로 단죄해 버린다. 이것이 역사의 승자와 패자의 차이다.

 

마지막으로 광주민주항쟁에 대해서다. 광주민주항쟁이 있기 전에 부산 마산 서울에서도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탱크 앞에서는 모두 숨을 죽여 버렸다. 그런데 광주시민들은 어떻게 했는가? 숨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의와 싸운 시민정신은 한동안 폭도로 매도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린 성지 광주! 나아가 전라도는 엉뚱하게도 삐딱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오명을 쓰고 전국적 편견에 희생되었다. 물론 경상도를 제외한 타 지역 사람들은 “너희 전라도만 피해자냐?”하는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전라도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좀 더 유별(?)나게 불의에 저항해 왔다는 것이고 그 숭고한 정신이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2017.12.7)

 

 

호남차별의 편견발생 원인

-  이용마 /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중에서 -

 

 1960년대 우리나라의 농촌인구는 전체 인구의 70퍼센트가 넘었다. 하지만 2017년 현재 농촌인구는 얼마나 될까? 전체 인구의 6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거의 모든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또 도시로 이동한 것이다. 그들은 공장 노동자와 영세상인,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용직 노동자가 되었다.

 

 영남지역은 공장이 많으니 영남의 농촌에서 흘러나온 인력을 웬만큼 수용했지만 호남 지역에는 공장이 없으니 호남 출신 인력은 대부분 수도권으로 갔고 그중 일부는 영남 지역 등 다른 공단 지대로 이주했다.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풍요로운 곡창 지대에 가장 많은 인구가 살았던 호남이 공업화 정책 이후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들게 된 배경이다. 또한 호남 출신들이 수도권에서 밑바닥층을 형성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자, 호남 사람에 대한 무시와 멸시가 출발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정부의 인사(人事)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국무총리나 장관 등 정부 고위직 공무원을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위주로 임명했고, 그 결과 호남 출신보다는 영남 출신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고위직이 영남 출신이니 아랫사람이 승진할 때도 영남 출신들은 자연스럽게 우대받은 반면, 호남 출신들은 배제되었다. 처음 고시 합격자수에서 영남과 호남 출신이 똑같아도 나중에 고위직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영남 출신이 대부분인 비대칭적 상황이 지속되었다. 박정희 정부부터 김영삼 정부까지 무려 36년 동안.

 

 이때만 해도 정부의 힘이 막강했고 정경유착으로 부정부패 또한 심했다. 정치권력이 뇌물을 고리로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기업에서 사업에 필요한 정부의 인허가를 받으려면 정부 고위직에 소위 을 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고위직이 대부분 영남 출신이다 보니 일반 기업에서도 영남 출신들을 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위직과 잘 아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고위직과 동향으로 말이 통할 수 있는 사람이 훨씬 로비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호남 출신들은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밀려났다,

 

 과거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깡패나 식모 등 밑바닥 인물들은 대부분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 돈을 떼먹고 달아나는 양아치나 조직의 배신자도 호남 출신이 많았다. 당시 호남의 인구가 가장 많았던 만큼 호남 출신 중에 이런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 출신이라고 이런 사람들이 없었을까? 유독 호남 출신들이 비난을 당하는 현상은 호남 사람들이 그만큼 우리 사회 밑바닥층을 형성하며 어렵고 독하게 살았다는 반증이다.

 

 이 때문에 일부 호남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만큼은 차별을 받지 않도록 본적을 수도권으로 옮겨 출신지를 숨겼다. 또 한편으로 사회의 천대를 피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뭉치기 시작했다. 호남향우회라는 특수조직이 생겨난 배경이다. 우리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진행된 호남 차별을 없애려면 정치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일종의 숙원도 생겨났다. 이 숙원이 김대중 대통령과 야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로 오랜 세월 이어졌다.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면 영남 출신 군인들이 중심이 된 독재 정권을 물리쳐야 했다. 호남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민주화를 지지하고 진보 성향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 위 글의 제목 호남차별의 편견발생 원인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 BUZZ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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