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이 자랑스러운가요?
Workers on their way home, Edvard Munch, 1913~1914
퇴근길, 모두들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넋이 나간 모습입니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언저리는 까맣게 푹 꺼져 있네요. 아예 눈, 코, 입조차 없는 노동자도 많아서 흡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 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일에 완전히 절어서 영혼이 소멸되어버린 듯한 이런 표정은 제게도 익숙합니다. 그저 견디는 것 말 고는 할 게 없는 지옥철에 몸을 실을 때, 납득할 수 없는 상사의 변덕으로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할 때, 보고를 위한보고서를 써야 할 때, 명확한 목표도 없이 ‘어쨌든 까라면 까는’ 일을 해야 할 때, 우리가 자주 짓게 되는 표정이기도 하니까요.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일에 치어 좀비가 되어갈 때, “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으면, 한가했으면 좋겠어”라고 주변에 바쁜 상황을 하소연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빠 죽겠다는 푸념이 좀 이상합니다. 혹시 그 안에 진짜 하고 싶은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승진 전쟁 대신 귀농을 선택한 젊은 농부를 만나기도 했다. 자족하는 삶이 부러우면서도 동시에 승진할 자신이 없어서 타협하듯 택한 회유책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의뭉스럽게 피어올랐다. 정규직 구하기를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여가를 즐기는 생활 방식을 선택한 프리터족을 인터뷰할 땐, 자기 시간을 어디에 쓸지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를 누려 좋겠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 동시에 한심하다는 느낌이 마음 한편에서 작게 꿈틀거렸다. 일을 덜 하기로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은근히 비하하는 태도가 나에게도 뿌리내려 있었던 것이다.
그 사고방식을 거꾸로 뒤집어보면 일은 많이 할수록 좋다는 신념이 된다.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그 시절 나는 일을 많이 해내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다른 직원보다 업무량이 많은 것. 업무시간이 긴 것, 남들이라면 손을 내저으며 이 시간 내에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난색을 표할 일을 맡아서 초인적으로 처리해낼 때 자부심을 느꼈다.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능력 있는 인재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시간을 쥐어짜듯 살면서도 커리어우먼의 삶은 다 그러겠거니 했다.
노동에 대한 찬미 산화를 깨준 존재, 내 ‘열심병’의 실체를 눈앞에 내밀어준 존재가 있다. 바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책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이다. 내 이야기 같은 구절이 책 안에 차고 넘쳤다. ‘돈을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대개 일하는 습관이 뼛속까지 배어 있는 무식한 사람’이라는 구절이나, ‘패디 같은 사람은 시간을 때울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할일이 없으면 쇠사슬에 묶인 개처럼 비참해진다’라는 구절을 읽을 때, 나는 뜨끔했다.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에 필요한 돈 이상의 돈을 벌고 있는데도 나는 왜 무작정 바쁘게 살고 있는 거지? 일이 없으면 쇠사슬에 묶인 개처럼 비참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왜 이렇게 잘 이해되는 거지?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푸념을 가장해 바쁨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를 바쁘게 만든 일들이 스스로에게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그 일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따져보지 않고 일단은 손이 비어 있는 것보다는 바쁜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바쁘면 어쨌든 쓸모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Edvard Munch - Workers Returning Home (1920)
피폐해진 노동자의 영혼을 퇴근길 좀비 떼로 표현한 에드바르 뭉크는 잘 알려진 것처럼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끊임없이 그려낸 화가다. 그의 대표작 <절규>뿐 아니라 그가 그린 작품 대부분에서는 불길한 위험이 느껴진다. 그림 속 인물은 군중 속에 있어도 혼자인 것처럼 흩어져 있다. 성별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시간은 낮인지 밤인지, 어디서부터 몸인지. 정확하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모호한 곡선들이 휘청거릴 뿐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그림 속 노동자들을 한 명 한 명 들여다본다. 아마 이들이 살았던 1920년대의 근로 조건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을 것이다. 하루에 12시간 넘게 온갖 공해 물질이 그득한 공장 안에 갇혀 죽기 살기로 일해야 겨우 푼돈을 쥘 수 있었을 테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은 고사하고, 그저 먹고살 수만 있으면 자신이 소진되든 말든 참고 일했을 것이다. 하루에 12시간 일하는 공장 대신 하루에 10시간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는 것 정도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슬프다. 그들로부터 100년 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기술이 발전한 사회에서, 모두들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그때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다양해진 직업적 가능성을 누리고 있는데도 자발적으로 잡역부 근성에 발목 잡힌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현실이. 왜 우리는 자기 효용감을 일이나 노동량이 아닌 다른 것들로 채우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걸까. 왜 남들이 시간을 쓰는 방식을 쉽게 평가하거나 비아냥대는 문화를 갖게 된 걸까.
한국사회에서 나고 자라면서 깊이 내면화되어버린 자본주의 경쟁 논리를 단박에 바꾸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바쁘다는 푸념을 습관처럼 내뱉지 않는 것에서부터 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지 않을까. 한 발만 물러나 생각해보면 바쁘다는 푸념은 내 시간을 마음대로 통제 하지 못한다는 부끄러운 고백이고, 그 안에 숨은 모래성처럼 허망한 우월감의 실체를 이제 알았으니 그것들과 서서히 이별 할 수 있겠지.
*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 노르웨이)
20세기 최고의 표현주의 화가.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을 지켜본 불행힌 유년기. 이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광기, 연인 툴라 라르센과의 폭력적인 이별, 질병에 대한 불안, 노년의 고독 등 지극히 사적인 삶 굽이굽이의 감정을 모두 창작의 소재로 사용했다. 뭉크의 그림은 그 자신의 역사다.
최혜진 / ‘명화가 내게 묻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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