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아침의 피아노

송담(松潭) 2018. 10. 22. 17:28

 

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

 

 

 

 김진영 선생님은 임종 3일 전 섬망(譫妄)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아침의 피아노의 글을 쓰셨다.

 

 

< 1 >

 

 

오늘은 주영이 화실 가는 날. 외출을 망설이는 등을 떠민다. 내 재촉을 못 이겨 거울 앞에 앉은 모습을 바라본다. 작고 동그란 몸, 늘 웃음을 담고 있다가 아무 때나 홍소를 터뜨려서 무거운 세상을 해맑게 깨트리는 웃음 항아리 같은 몸.

 

 나는 이 잘 웃는 여자를 떠날 수 있을까.

 

 

< 2 >

 

야채장수 일러스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트럭에서 야채를 산다. 왜 이렇게 비싸요. 며칠 전엔 1000원밖에 안 했는데... 여자가 꽈리고추 봉지를 들고 불평하니까 야채 장수는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예쁘게 생겼잖아요. 사람이나 물건이나 예쁘면 비싼 거예요. 아침마다 아파트 앞에 트럭을 세우는 이 남자는 방금 떼어 온 야채들처럼 늘 싱싱하다. 그의 목소리가 크지만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듣는 사람의 배 속으로 들어가서 근심을 쫓아내고 마음을 비워준다. 그건 분명 그의 목청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는 생의 명랑성 때문이다. 정신이 깊고 고요한 것만은 아니다(그것이 나의 오랜 착각이었다). 정신은 우렁찬 것이기도 하다. 우렁찬 정신은 야채 장수처럼 목청으로 제 존재를 보여준다. 그 목청의 정신을 배울 때다.

 

 

< 3 >

 

 

 베란다에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간절한 마음이 된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 4 >

 

 

 아침마다 체중을 달고 거울을 본다. 몸의 무게는 조금씩 가벼워지는데 얼굴빛은 나날이 밝아진다. 나는 차츰 빛이 되어가는 걸까. 하기야 내가 품었던 꿈들 중의 하나는 투명 하게 소멸astral body하는 것이었다.

 

< 5 >

 

 

 길가 그늘에 앉아서 풍경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무심히 오고 간다. 시간도 생도 무심히 흘러간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한 곳으로 간다. 이것이 존재인가, 나무 그늘 아래 두 사람이 앉아있다. 쉬지 않고 서로 수화를 한다. 쉬지 않고 얼굴이 웃는다. 얼핏 미풍이 잎들 사이를 지나갈 때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그만 좀 웃겨, 너무 우스워서 말을 못 하겠어 .."

 침묵의 홍소, 이것이 존재인가.

 

 

< 6 >

 

  날이 갈수록 지친다. 이제는 모든 힘들이 소진된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내게는 많은 힘들이 충분히 남아 있다. 그 힘들이 다만 무기력한 잠재력으로 고여 있을 뿐이다. 그걸 길어내어 모두 써야 한다. 아니면 나는 이 싸움에서 패배한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기어코 돌파해야 한다. 나의 사랑을 증명해야 한다.

 

< 7 >

 

 

 

기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병은 시간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깨어나게 만든다. 환자가 아니었을 때 나는 자주 읽게 되는 암 환자의 5년 생존율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야 더 모자라면 어떻고 더 길어지면 또 무슨 대수이냐고만 여겼었다. 그때 유한성의 경계는 멀고 시간은 다만 추상적 길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게 시간은 더는 추상적 길이가 아니다. 그건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질량이고 무게이고 깊이다. 그러니까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다. 시간은 이제 내게 존재 그 자체이다.

 

 

< 8 >

 

아침의 피아노. 베란다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제 무엇으로 피아노에 응답할 수 있을. 이 질문은 틀렸다. 피아노는 사랑이다. 피아노에게 응답해야 하는 것 그것도 사랑뿐이다.

 

< 9 >

 

 아침의 아파트 앞마당.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아 있다. 바람이 불어서 아직 덥지 않다. 새들이 울고 담장 너머로 자동차 소리가 지나간다. 가끔 문을 나와서 빠른 걸음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구두 소리가 지나간다. 주차장 한편에 서 있는 나의 자동차를 바라본다. 매일 아침 알렉산더의 충실한 명마처럼 나를 싣고 떠나던 나의 낡은 자동차지금은 나처럼 조용히 턱 괴고 앉은 나의 오랜 친구. 바라보면 외롭지만 너무 많이 외롭지는 않다. 조용히 외로운 것들은 늘 안에 무언가를 머금고 있기 때문일까, 나무들 사이 열린 허공의 창 안에 아침 빛이 그득하다.

 

 

< 10 >

 

 거울을 본다. 내 얼굴을 본다. 웃어본다. 누군가는 나의 웃는 얼굴을 미소 천사라고 불러주었다. 그 미소가 사라진 건 아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내게 그대로 있다. 아무것도 빼앗기면 안 된다.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 나의 삶을 꼭 붙들어야 한다. 집 떠나는 엄마의 치마폭을 붙들고 놓지 않는 아이처럼.

 

 

< 11 >

 

 더 오래 살아야 하는 건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미루었던 일들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다.그것이 아니라면 애써 이 불가능한 삶과의 투쟁이 무슨 소용인가.

 

 

< 12 >

 

 한동안 눈뜨면 하루가 아득했다. 텅 빈 시간의 안개가 눈앞을 가리고 그 안개의 하루를 건너갈 일이 막막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에 눈떠서 문뜩 중얼거린다.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

 

 

  작가의 말

 

 

 20177월 암 선고를 받았다. 그동안 이어지던 모든 일상의 삶들이 셔터를 내린 것처럼 중단되었다.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고 환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꼭13개월이 지났다. 이 글은 그사이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지나간 작은 사건들의 기록이다. 환자의 삶과 그 삶의 독자성과 권위, 비로소 만나고 발견하게 된 사랑과 감사에 대한 기억과 성찰, 세상과 타자들에 대해서 눈 떠진 사유들. 혹은 그냥 무연히 눈앞으로 마음 곁으로 오고 가고 또 다가와서 떠나는 무의미한 순간들이 그 기록의 내용들이다.

 

 폴 발레리와 롤랑 바르트가 쓰고 싶어 했던 모종의 책처럼 이 기록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써진 사적인 글들이다. 이 글은 때문에 책의 자격이 없다. 하지만 한 개체의 내면 특히 그 개인성이 위기에 처한 상황 속 개인의 내면은 또한 객관성의 영역과 필연적으로 겹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가장 사적인 기록을 공적인 매개물인 한 권의 책으로 묶어보고 싶은 변명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이 나와 비슷하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의 위기에 처한 이들에 조금이나마 성찰과 위안의 독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반드시 변명만은 아니리라.

 

 

 

  김진영 / ‘아침의 피아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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