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민족의 자긍심을 음악으로 드높이다
드보르자크 Vs 스메타나
보헤미아의 브람스 드보르자크
드보르자크는 1841년 보헤미아의 넬라호제베스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블타바 강변의 자그마한 마을입니다. 그는 여관을 겸한 푸줏간집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곧잘 연주하곤 했는데, 당시 체코 사람들은 악기 하나쯤은 누구나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7세기 초반에 체코를 지배하던 게르만 귀족들이 그들의 여흥을 위해 체코인들에게 악기를 배우도록 장려했기 때문이었지요.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체코는 많은 음악인들을 배출했습니다.
당시 푸줏간에서 일을 하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자격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들을 외삼촌이 있는 소도시로 보냅니다. 당시는 독일인 관리들과 상인들이 사회를 주도하고 있었으며, 상류사회에서는 독일어만 쓰던 때였습니다. 푸주한 자격증을 따려면 통치국의 언어인 독일어를 잘할 줄 알아야 했지요. 어린 드보르자크는 푸주한 면허를 따기 위한 교육에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음악이었지요.
한 인물의 성공 이면에는 늘 도와준 준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드보르자크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이지요. 드보르자크가 브람스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브람스는 드보르자크를 대작곡가로 만든 은인이었습니다. 드보르자크와 브람스의 인연은 18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른여섯의 드보르자크는 오스트리아 문화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작품을 제출했습니다. 이때 심사위원이었던 브람스가 드보르자크의 비범함에 주목하고 장학금을 받도록 힘을 써주었지요. 이때부터 브람스는 이 생면부지의 외국 작곡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브람스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난 뒤부터 드보르자크의 재능은 활짝 꽃을 피웠습니다. 그의 활동 영역은 음악의 변두리인 체코에서 음악의 중심지인 빈을 비롯한 유럽 각국으로 넓어졌습니다. 특히 그는 영국에서 과거에 하이든이 그랬던 것처럼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런던에서 고향곡 제7번을 초연했을 때는 ‘보헤미아의 브람스’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았습니다.
보헤미아의 브람스 드보르자크에게 이처럼 잘 어울리는 칭호도 없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보르자크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브람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음악은 형제처럼 닮은 점이 많습니다. 브람스의 경우처럼 드보르자크의 음악도 절대음악적이며 실내악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또한 고전적이면서도 낭만적이지요.
민족적 요소와 교향적 전통을 잘 조화시킨 드보르자크는 건강하고 생동감 넘치는 음악을 창조해냈습니다. 병적인 낭만주의가 범람하던 19세기 음악사에서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지요. 풍부한 창의성과 편안함, 자연스러운 표현력은 전통이냐 혁신이냐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그것이 드보르자크의 위대한 점일 것입니다.
어느 날 드보르 자크는 뉴욕에서 날아온 전보를 한 통 받습니다, 발신인의 이름은 재닛 더버, 여성이었습니다. 전보에는 간단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선생님을 뉴욕 국립음악원의 원장으로 추대합니다. 이 뜻밖의 제안에 드보르자크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습니다. 체코 밖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데, 유럽도 아니고 더구나 그 머나먼 미국에서 오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요. 요즘에야 비행기를 타면 금방이지만 그 당시 미국은 유럽에서 배로 몇 날 며칠을 가야 도착하는 머나먼 신대륙이었지요.
체코를 떠난 일이 없던 작곡가는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여러 모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과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스케일에 압도되었습니다. 다음에는 흑인과 인디언에 대한 백인들의 무자비한 인종차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니, 경약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게르만족에게 오랜 세월 탄압당한 체코인으로서 그런 비인간적인 대우는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음악가로서 그는 곧 이 소외된 자들의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들이 부르는 영가와 인디언 음악은 이국땅에 있던 그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드보르자크는 이들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저 유명한 교향곡 <신세계에서>와 현악 4중주 <아메리카>를 창조했습니다. 그는 흑인과 인디언의 음악에서 얻은 영감에 체코적 요소를 융합시켜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체코의 국민음악가 스메타나
스메타나는 드보르자크, 야나체크Les Janáček 1854~1928와 더불어 체코 국민주의 음악의 3인방으로 꼽힙니다. 세 사람 중에서도 스메타나는 가장 선구적인 작곡가였지요. 그는 민족적인 주제, 즉 체코의 전설이나 역사 풍경·인물·사상 등을 담은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 체코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최초의 작곡가입니다.
체코 민족의 정신과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 스메타나의 음악은 독창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체코만의 음악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까닭에 시대를 초월하여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스메타나는 1824년 보헤미아의 리토미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소유의 양조장을 경영하는 사람이었지요. 아버지의 생일날, 당시 다섯 살이던 스메타나는 현악 4중주의 일원으로 참여해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했고, 여섯 살 때는 피아노 공개 연주회와 보헤미아의 황제 프란츠 1세의 명명일(이름 지은 날을 축하하는 날) 축하 연주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만큼 일찍이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선보였습니다. 한마디로 신동이었지요.
그의 꿈은 모차르트나 리스트 같은 음악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이미 고인이었지만 리스트는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열여섯 살 때 리스트의 연주를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리스트의 현란한 연주 솜씨에 탄복한 소년 스메타나는 “피아노의 기교로는 리스트처럼, 작곡으로는 모차르트처럼 될 것이다"라고 일기장에 적어놓았습니다.
리스트가 ‘바이올린의 귀신’이라 불리던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한 대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린 시절의 체험은 이처럼 평생을 좌우할 만큼 소중한 것이지요.
드보르자크에게 브람스가 있었다면, 스메타나에게는 리스트라는 든든한 후견인이 있었습니다. 스메타나는 리스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오페라에 리스트의 오케스트레이션과 주제 변형 기법을 사용한 것이 그 예입니다. 바이마르에서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의 초연을 들은 후에 쓴 첫 번째 교향시 <리처드 3세>에도 그 영향이 엿보입니다. 스메타나가 피아노의 대가인 리스트에게서 관현악의 작곡법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그 자신도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으면서 피아노 작품보다는 오페라와 관현악 실내악 작품에서 재능을 보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당시 체코에서 음악가로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았던 스메타나는 일자리를 찾아 스웨덴으로 갔다가 3년 만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옵니다. 이국땅에서 음악적으로 성과를 올렸다는 자신감과 조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나폴레옹 군대에 패배하면서 체코에 대한 문화정책을 완화한 것도 조국으로 돌아온 계기였습니다. 이제 원숙한 음악가로 돌아온 스메타나는 조국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칩니다.
그는 오페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오페라야말로 인간의 삶을 총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려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페라만큼 민중에게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마침 체코에서도 새로운 오페라 극장의 개관을 준비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스메타나가 처음 세상에 발표한 오페라가 <보헤마아 브란덴부르크가>라는 작품입니다. 모두 여덟 편의 오페라를 발표한 스메타나는 관현악과 실내악에서도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과 현악 4중주곡 <나의 생애에서>가 대표적인 작품이지요.
젊은 날 혁명에 참여하면서 오스트리아의 폭압정치를 실감한 스메타나는 음악가로서 체코의 음악을 근대화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체코 음악의 전통적 요소들을 유럽 음악의 틀에 녹여내 체코만의 독특한 음악을 창조하는 데 성공합니다. 체코 음악의 나아갈 바를 제시한 것이지요. 드보르자크도 스메타나가 다져놓은 토양이 없었다면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메타나는 체코 근대 음악의 아버지라 일컬어지곤 합니다.
매년 5월 12일이면 체코 프라하에서는 어김없이 ‘프라하의 봄’이라는 세계적인 음악제가 열립니다. 이 음악제의 시작일이 12일인 것은 스메타나의 서거일을 기념하려는 취지 때문입니다. 이 음악제는 반드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연주하며 시작을 알립니다. 스메타나를 추모하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스메타나는 체코 음악가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애국자이며, <나의 조국>은 체코인들의 애국가인 것입니다.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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