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미식가 로시니
이탈리아의 천재 소년 로시니
로시니는 베토벤보다 22년 늦은 1792년,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2월 29일에 이탈리아 중부의 페자로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로시니의 아버지는 호른 주자였고, 어머니는 소프라노 가수였으므로 로시니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면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로시니에게 악기를 가르쳤는데, 로시니는 뛰어난 소질을 보여 교회 성가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로시니 가족은 불행한 일을 겪게 됩니다. 열렬한 민주주의자였던 로시니의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이 일로 로시니 가족은 볼로냐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로시니는 그곳에서 종교 음악 작곡으로 유명했던 안토니오 테제이에게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머잖아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습니다. 열두 살에는 ⌜현악 4중주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고, 열네 살에는 오페라를 썼으니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음악 천재였던 셈이지요.
15세 되던 해, 로시니는 볼로냐에 있는 음악 학교에 들어가 첼로, 피아노 연주법과 작곡 등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로시니는 그다지 학구적인 아이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딱딱한 수업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업 시간에 배우는 내용보다 혼자서 모차르트나 하이든 같은 초기 고전파작곡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로시니는 낭만파 음악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에 활동하면서도 고전파에 가까운 음악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20대 초반 로시니는 작곡가뿐만 아니라 지휘자, 극장장을 지냈고 1813년 <탄크레디>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를 공연해 호평을 받았고 1816년 로마에서 공연한 <세비야의 이발사> 역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로시니는 일류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1822년 로시니는 자신의 오페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주연을 맡은 성악가 이사벨라 콜브란과 결혼합니다. 이해에 그는 당시 유럽을 쥐고 흔들던 빈의 정치가 메테르니히의 요구로 4개국 회의를 위한 칸타타를 작곡하게 되면서 반을 방문했고, 그 무렵 병마와 싸우면서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던 베토벤을 만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베토벤은 로시니에게 비극의 성격이 강한 오페라 세리아를 쓰지 말고 “더 많은 <이발사>를 쓰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때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던 로시니는 한창 나이인 37세에 오페라에서 손을 떼고, 이후 오페라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도 거의 쓰지 않습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음악을 그만둔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우선 신체적인 질병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무렵 그는 신경계통의 병에 걸려 자주 발작을 일으켰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18세부터 37세까지 40편의 오페라를 작곡하는 등 활동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밖에도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음악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 그는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굉장한 부자가 되었으므로 음악을 그만두고도 여생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로시니는 이탈리아 볼로냐로 돌아가 모교인 볼로냐 음악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만년을 파리에서 보냈습니다. 그 무렵 로시니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미식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식욕을 채우지 못했던지 나중에는 직접 요리를 배워서 여러 권의 요리책을 내는 등 요리전문가로도 이름을 떨쳤습니다.
시대가 원하는 음악가
늘 고뇌하던 베토벤과 달리 로시니는 낙천적인 성격에 농담을 즐기는 성품이었는데 그의 작품 역시 주인을 닮아 생기 발랄하고 힘이 넘쳤습니다. 그으; 작품이 유독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바로 사회적인 분위기였습니다. 로시니가 주로 활동하던 1820~30년대의 유럽 사회는 무척 암울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에 이은 격한 풍랑으로 사람들이 지쳐 있던 데다가 혁명 이전의 시대로 되돌리려는 보수반동주의 풍조가 유럽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골치 아프고 심각한 것보다는 밝고 가벼운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데, 음악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앞에서도 밝혔듯 어떤 분위기가 한참 유행하다 보면 그와 반대되는 취향이 생겨나는 법이지요. 이 시기 유럽 사람들 역시 베토벤의 심각한 음악에 다소 지쳐 있었습니다.
이 같은 대중의 새로운 욕구에 가장 걸맞았던 음악이 바로 로시니의 음악이었습니다. 너무 심각하지 않고 밝고 가볍고 익살스러운 음악 그러면서도 고전파 음악의 정돈된 느낌을 이어받은 로시니의 음악은 시대의 분위기에 지친 사람들에게 상큼한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로시니가 베토벤처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음악가였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로시니는 타고난 낙천적 성격으로 조금은 게으르다 싶을 만큼 대중의 정서를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음악가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밖에도 로시니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익살스러운 일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말년에 요리에 심취하고, 생일이 4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니 열여덟 살밖에 안 되었다고 우겼으며, 미신을 맹목적으로 믿어서 13일의 금요일에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지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그토록 싫어하던 13일의 금요일에 세상을 떠난 것까지 그의 삶은 한 편의 코믹한 오페라 그 자체였습니다.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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