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후기 낭만주의의 색다른 계승자들

송담(松潭) 2018. 8. 26. 10:33

 

후기 낭만주의의 색다른 계승자들

브람스 Vs 바그너

 

 

 

 

 

내성적이고 섬세한 브람스는 소용돌이치는 낭만주의의 파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에 몰두했습니다. 스스로 베토벤 추종자라고 일컬을 만큼 고전음악의 매력에 깊이 빠져 유행을 따르기나,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반면 성격이 적극적이었던 바그너는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낭만주의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을 중시한 고전파 음악을 비판하는 한편 음악은 문학·연극 등과 어우러진 종합예술의 일부분이다"라는 종합예술론을 전개해 음악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을 거부했습니다. 이렇듯 시각이 달랐기에 두 사람은 세게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유럽 음악이 브람스파바그너파로 양분되는 사태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천재, 브람스

 

 후기 낭만파 시대를 이끈 음악가 브람스는 18335월 독일의 항구도시인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요한 야코프 브람스는 함부르크 시립극장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으며,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나이가 열일곱 살이나 많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음악적 재능을, 어머니에게 성실한 성품을 물려받은 브람스는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과 첼로 등 악기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최초의 음악 선생님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브람스의 인생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학교까지 중퇴한 브람스는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술집, 삭당, 사교장을 돌아다니면서 피아노를 연주해야 했습니다.

 

 

 스승의 아내를 향한 일편단심

 

 

 브람스 음악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영햐을 준 사람은 슈만 부부였습니다. 뒤셀도르프에서 브람스를 처음 만난 슈만은 이 젊은 인재가 반가운 나머지 한 달 동안 자기 집에서 묵게 했습니다. 그리고 브람스의 음악을 감상하면서 천재라고 칭찬했습니다. 슈만 부부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에 음악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브람스는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한데 슈만 부부에게 엄청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1844년 클라라의 4개월에 걸친 러시아 연주 여행에 동행한 여파로 슈만은 정신과 육체적 건강이 악화되어 정신병을 앓다가 1854, 결국 라인 강에 투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구조되었으나 일곱 명의 아이들과 함께 남겨진 클라라를 지켜보는 브람스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브람스는 곤경에 처한 슈만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한편 실의에 빠진 클라라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브람스의 가슴속에서는 예기치 못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클라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브람스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다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분은 스승의 부인이므로 존경할 뿐이다라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평생 동안 클라라와 우정을 지켰습니다. 자살을 시도한 지 2년 만에 슈만이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브람스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브람스는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스승과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독일 진혼곡>을 발표합니다. 작곡가로서 브람스의 이름을 널리 알린 <독일 진혼곡>은 라틴어로 쓰인 여느 진혼곡들과 달리 모국어인 독일어로 쓰였으며,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보다는 살아남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가 살아남은 자를 위한 진혼곡을 작곡하게 된 것은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남편의 죽음으로 슬픔에 처한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브람스와 클라라는 40년에 걸친 우정의 편지를 주고받게 됩니다. 호칭은 경애애하는 부인에서 나의 클라라에게’, 높임말인 '부인sie'에서 친밀한 표현인 '당신Du'으로 달라졌지만, 우정을 지키려는 마음은 끝내 잃지 않습니다.

 

 클라라를 향한 그의 일편단심은 평생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많은 여인들이 주위에 몰려들었지만 브람스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귀찮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파티에 참석한 브람스는 많은 부인들이 주위에 몰려들자 귀찮아졌습니다. 그래서 평소 잘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계속 피워댔습니다, 그러자 부인들은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그중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여자들 앞에서 그렇게 담배를 피우시다니,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브람스는 태연하게 받아쳤습니다.

 “천사들이 있는 곳에 구름이 없을 수 있겠소

 

 브람스의 이 같은 성격은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바그너와는 딴판이었습니다. 바그너가 평생 많은 여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염문을 뿌린 것과는 반대로 브람스는 단 한 사람만을 가슴에 품고 그조차 이성으로 절제하면서 살았으니까요.

 

 

 클라라를 뒤따른 죽음

 

 한평생 왕성한 활동을 펼쳐오던 브람스.... 클라라를 향한 사모의 정을 가슴에 묻어둔 채 독신으로 지내온 그도 어느덧 60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오선지에 무엇인가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것은 바로 성경을 토대로 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였습니다. 죽음에 관한 명상을 다룬 이 노래는 1896년 봄, 브람스의 63번째 생일에 완성되었는데 그로부터 13일 뒤,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게 됩니다. 한평생 사모해오던 클라라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삶을 지탱해온 사랑을 잃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저승에서나마 사랑을 이루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날 이후 브람스는 눈에 띄게 쇠약해지더니 결국 간암으로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 64세의 나이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 눈을 감았습니다.

 

 낭만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고전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확립했던 브람스의 죽음을 사람들은 몹시 슬퍼했습니다, 브람스의 고향 함부르크에서는 모든 배들이 조기를 게양했고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그의 주검은 빈 주앙묘지에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바그너의 어린 시절

 

바그너는 18135,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아홉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경찰 서기였는데 바그너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그너는 재혼한 의붓 아버지에게서 예술에 대한 안목을 얻게 됩니다. 훗날 바그너가 종합예술을 추구하게 된 것도 의붓아버지의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붓아버지와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바그너가 여덟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가장을 잃은 바그너 가족은 드레스덴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곳 드래스덴 극장에서 바그너는 매우 인상적인 공연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베버의 <마탄의 사수>였습니다. 이 공연을 보면서 바그너는 처음으로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정 형편은 넉넉지 않았지만 바그너는 호프만과 셰익스파이의 문학 작품을 열심히 읽고, 연극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관심으로 그치지 않고 <로이발트>라는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바그너는 바인리히라는 스승에게 본격적으로 작곡 이론을 배우기 시작하여 다음 해에 처음으로 교향곡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바그너의 관심은 역시 오페라에 쏠려 있었으므로, 그는 오페라 작곡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바그너의 여인들

 

 브람스와 바그너는 음악을 보는 입장뿐만 아니라 이성관계에 있어 서도 극과 극의 차이를 보였습니다. 내성적이고 이성적인 브람스가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한 사람에 대한 연정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것과 달리, 감정표현에 솔직한 바그너는 평생 많은 여자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바그너의 첫 번째 부인은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자신의 오페라 단원이었던 여배우 미나였습니다. 그러나 바그너는 그다지 가정에 충실한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취리히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자신을 돌봐주던 후원자 베젠동크 부인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바그너는 이때 겪은 실연의 아픔을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오페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바그너의 바람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제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이자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졸지에 스승에게 아내를 빼앗긴 뷜로는 이후 바그너의 반대편으로 돌아서서 그를 비난하는 데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이미 자녀를 셋이나 낳은 바그너와 코지마는 미나가 죽은 지 4년 후인 1870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여러 여자와 스캔들을 일으키는 바람에 바그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음악에 집중한 편안한 말년

 

 고국을 떠난 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여기저기 떠돌던 바그너는 51세가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새로 즉위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18세의 젊은 국왕 루트비히 2세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으므로, 바그너는 국왕의 보호 아래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루트비히 2세는 뮌헨과 루체른 교외에 집을 제공하고, 바이로이트 극장 건립을 지원하며 작곡료를 주는 등 그가 마음껏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에 몰입하고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하는 등 오랫동안 바라던 일을 이루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이로이트 언덕에 축제극장을 짓고, 창작에 손을 댄 지26년 만에 완성된 <니벨룽의 반지>를 개관 기념 첫 작품으로 공연했습니다.

 

 그 후 자신의 예술이론을 담은 <종교와 예술>을 집필하고,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을 공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가 70세가 되던 해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그너의 <탄호이저>

 

탄호이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바그너는 야심가로서 음악을 만드는데 만족하지 않고 '종합예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창조했습니다. 음악·문학 신화·연극 등 예술의 모든 영역을 통합해 '악극'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공연의 규모를 대형화했습니다. 짧게는 네다섯 시간, 길게는 며칠이 걸리는 긴 작품. 기존의 오페라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규모 무대 등..... 바그너의 작품은 마치 35밀리 영화만을 보다가 70밀리 대형스크린 영화를 접하는 듯한 충격을 관객들에게 안겨주었습니다.

 

 <탄호이저>는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 초기 작품에 속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종합예술화한 작품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대 배경이 웅장하다거나 관악기를 많이 쓰는 등 기존의 작품들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내용도 기존의 오페라는 개인의 감정, 사랑이나 미움, 배반 등을 주로 다루었던 데 비해, 바그너는 신화나 전설, 종교적 내용 등을 밑바탕에 두었는데 <탄호이저>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로마 신화의 비너스 여신이 등장해 탄호이저를 유혹하지만, 신앙심 깊은 약혼녀가 탄호이저를 구원한다는 내용이니까요.

 

바그너의 작품은 후기작일수록 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규모가 크고, 곡이 길어서 웬만한 극장에서는 연주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나라 연주자들에게는 체력적으로도 적당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곡을 연주하는 연주자들 중에는 씨름 선수 같은 거구의 연주자들이 많습니다. 그 정도 체격은 돼야 바그너의 곡을 연주할 수 있다는 의미겠지요.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