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러시아 음악의 발전을 이루다

송담(松潭) 2018. 8. 27. 10:24

 

러시아 음악의 발전을 이루다

차이콥스키 Vs 림스키코르사코프

 

 

 

 

 

 

 러시아 음악의 태양 차이콥스키

 

 16세기 후반까지 러시아는 음악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고전주의를 넘어서 각각의 개성을 살린 난만주의로 분화되고 있었으나, 러시아에서는 고잔음악의 기초조차 확립되어 있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러시아 음악계의 사정은 차이콥스키 등장 이후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서양음악의 전통적인 기법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러시아 고유의 분위기를 살려 세련된 음악을 창조함으로써 불모지 러시아에 음악의 싹을 틔운 것입니다. 차이콥스키가 등장한 이후 러시아 음악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급기야 세계 음악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현대음악의 본고장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황제가 지배하고 있던 18405, 우랄 지방의 외딴 시골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광산기술자여서 가족이 한 곳에 정착하기 보다는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면서 살았고 어머니는 프랑스 혈통을 이어받았는데 피아노를 치면서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자주 불렀습니다.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이콥스키는 부모의 뜻에 따라 법률학교에 진학해 법무부에 취직했으나 흥미를 느낄 수 없어 결국 음악을 더 공부하기 위해 러시아음악협회가 운영하는 음악 교실에 들어갔습니다. 1866, 우수한 성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한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로 가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이자 작곡가로서, 음악 평론가로서 활동합니다. 그는 마침내 최초의 대작 <교향곡 제1>을 발표해 성공을 거둠으로써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892년 유명한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을 완성해 세상에 발표한 차이콥스키는 쉬지도 않고 곧장 다음 곡 <교향곡 제6B단조>를 작곡하는 한편, 유럽 순회 연주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는 런던 필하모니를 지휘한 적이 있었는데, 연주회가 끝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일하고 있던 1876년 차이콥스키는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보고 큰 감동을 받습니다. 얼마 후 그는 귀국해서 유명한 발레음악 <백조의 호수>를 작곡합니다. 볼쇼이 극장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백조의 호수>는 훗날 그의 이름을 크게 빛내게 되지만 처음 공연할 당시만 해도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무렵,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작곡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준 폰 메크 부인을 알게 됩니다. 철도 경영자였던 남편과 사별한 폰 메크 부인은 그의 음악을 매우 칭찬하면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악보 출판비를 대주고, 빚을 갚도록 돈을 빌려주다가 1877년부터는 1년에 6,000루블씩 보내주었습니다. 이로써 생계 걱정을 덜게 된 차이콥스키는 음악원 교수직을 그만두고 작곡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미있게도 두 사람은 평생 편지만 교환했고, 딱 한 번 우연히 마주친 일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189310월 차이콥스키는 여섯 번째 교향곡을 완성해 자신의 지휘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첫선을 보였습니다. 그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겁고 비장한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차이콥스키에게 표제를 붙이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표제는 수수께끼로 남겨두어야 한다. 각자의 추측에 맡긴다라며 표제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첫 공연을 한 지 일주일 만에 그는 콜레라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죽음 믿기지 않는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미심쩍은 죽음에 대해서 훗날 소련 정부는 추적에 추적을 거듭해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사인이 콜레라가 아니라 음독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차이콥스키는 법률 학교 시절에 동급생들과 동성애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비밀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법률 학교 출신 고위 관리들이 독약을 마시도록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뜻하지 않은 그의 죽음을 접한 사람들은 이제 러시아 음악의 태양은 사라졌다라고 슬퍼하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한 마지막 작품 <교향곡 제6>비창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민족음악의 선구자 림스키코르사코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44년 러시아의 노브고로드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해군 장교를 지낸 가문이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해군 장교였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가정은 대체로 음악을 즐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피아노를 쳤고, 함께 살고 있던 삼촌은 민속음악에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무소륵스키, 큐이, 보로딘 등의 음악가들과 만나면서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파 5인조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국민주의 음악이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북유럽 국가에서 나타난 경향으로, 후기낭만주의와 나폴레옹의 몰락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을 거치면서 문학·미술·음악 등 모든 예술은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쪽으로 변화했습니다. 이전의 예술이 왕이나 귀족 등 힘 있는 사람들을 주로 다루던 것과 달리 낭만주의는 평범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유럽 중심의 문화에서 소외되어 있던 러시아나 북유럽 등의 국가에서도 자국만의 개성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유럽 전역을 휩쓸던 나폴레옹의 멸망도 국민주의를 더욱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군대에 짓눌린 경험을 통해 민족의 소중함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국민주의는 자기 민족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요나 춤곡 옛이야기를 주제로 음악이나 문학 미술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민족성을 고취하는 한편, 서유럽 중심의 음악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이탈리아어 음악 용어 대신 러시아어 음악 용어를 쓴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였습니다.

 

 때문에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5인조는 차이콥스키와 갈등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이 볼 때 서유럽 정통 음악 이론에 충실한 차이콥스키는 외세 음악을 따르는 음악가였으니까요.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오페라 작품 <금계金鶴>를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에는 어리석은 황제가 등장했기 때문에 당연히 상연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08. 그는 몇 차례에 걸친 협심증 발작 끝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년 뒤인 1909, <금계>는 비로소 모스크바에서 세상에 첫선을 보였습니다.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