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피아노 위의 두 거장

송담(松潭) 2018. 8. 25. 12:32

 

피아노 위의 두 거장

쇼팽 Vs 리스트

 

 

 

 

 피아노를 사랑한 쇼팽과 리스트

 

 인류의 음악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음악가들의 면면을 보면 아주 어릴 적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나타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100100색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장간지기에서 은행가까지 직업도 천차만별이었고, 가정환경이나 성격도 가지가지였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가치관에 따라 다른 길을 걸은 음악가들이 있습니다. 쇼팽과 리스트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한 해 차이로 이 세상에 태어난 쇼팽과 리스트는 모두 피아노를 사랑한 음악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추구한 바는 조금 달랐는데, 쇼팽은 마치 시인이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쓰듯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섬세한 방법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자 애쓴 반면, 리스트는 기교를 중시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주법에 도전했습니다. 피아노를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던 셈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성격도 매우 달랐는데, 쇼팽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반면, 리스트는 활달하고 카리스마가 강한 성격이었습니다. 짝사랑하는 소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끝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을 떠난 쇼팽이 있는가 하면, 아버지가 여자를 멀리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도 평생 많은 여자들과 스캔들을 뿌린 리스트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성격은 음악 활동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쇼팽은 대중 앞에 나서기보다는 귀족의 살롱에서 조용히 연주하는 것을 즐겼으나, 리스트는 공개 연주회를 더 좋아해 수많은 여성 팬을 몰고 다니는 톱스타로 인기를 누렸습니다.

 

 또 쇼팽은 일찍이 병을 얻어 마흔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반면, 리스트는 75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니 확실히 쇼팽처럼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이 예술가답기는 하나 오래 살기는 힘든 가 봅니다.

 

 

 피아노로 시를 쓰는 음악가

 

'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1810년 폴란드 바르샤바 근처의 젤라조바볼라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사회적인 불안을 피해 폴란드로 이주한 프랑스 사람이었습니다.

 

 쇼팽은 피아노를 너무나 사랑한 음악가였으므로 주로 피아노곡을 만들었습니다. 음악사를 통틀어 그만큼 피아노를 잘 알고 또 피아노의 특징을 최대한 살린 음악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섬세하고도 다양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피아노가 자유자재로 노래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는 특히 피아노를 위한 소품곡을 많이 만들었는데, 야상곡, 마주르카, 폴로네즈, 환상곡, 프렐류드, 왈츠 등이 그것입니다 .물론 이런 소품곡의 장르는 쇼팽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곡을 만들어서 세상에 널리 소개한 사람은 쇼팽이었습니다. 쇼팽이 아니었다면 녹턴이니 폴로네즈니 하는 장르는 오늘날까지 사랑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쇼팽이 처음 만들어낸 장르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발라드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한편, 쇼팽은 낭만파에 속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음악에 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베토벤처럼, 음악이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매우 서정적입니다 인간이 흔히 느끼는 희로애락보다는 아련한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마치 글 대신 피아노로 쓴 한편의 서정시 같습니다. 글이 아닌 피아노로 시를 쓰는 음악가! 사람들이 그를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제 알겠지요?

 

 

 

 헝가리의 천재 소년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파아노 연주로 널리 알려진 프란츠 리스트는 쇼팽보다 한 해 늦은 1811년 헝가리의 라이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토지 관리인이었습니다. 하이든의 고용주 겸 후원자였던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에는 언제나 음악이 넘쳐흘렀는데 토지 관리인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피아노와 첼로를 연주하는 등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리스트가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음악에 소질이 있는 것을 눈치 채고는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리스트는 평생 많은 음악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빈에서는 체르니와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고, 파리에 정착한 이후에는 쇼팽, 파가니니와 친분을 맺었습니다. 특히 파가니니와의 교제는 리스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파가니니의 연주회를 관람한 뒤 리스트는 기교를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스스로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그의 피아노곡은 어려운 연주 기교를 통해 화려한 효과를 냅니다. 열아홉 곡으로 된 <헝가리안 랩소디>, 열두 곡으로 된 <초절기교 연습곡> 등을 발표하면서 리스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교에 도전하는 음악가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 파가니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리스트의 이름은 지금처럼 유명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테니, 이 만남은 리스트에게는 운명적이었던 셈이지요.

 

 성직자 리스트로 삶을 마감하다

 

 리스트는 성직자의 삶을 선택하고 몬테카를로의 마돈나 델 로사리오 수도회로 들어갔습니다. 1863년 그의 나이 52세 때 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그리스도가 탄생하시다>등 수많은 종교 음악을 작곡하고 가톨릭에서 주최하는 자선 음악회에서 연주를 하는 등 종교 음악가로 살게 되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그 공로를 인정하여 리스트를 바티칸으로 불러들이고, 성직을 세 개나 주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1871년에는 헝가리 왕실 고문으로 임명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말년에 그는 로마, 바이마르, 부다페스트의 세 지역을 오가면서 자신의 곡은 물론 선후배 음악가들의 명곡을 지휘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질병조차 그의 연주 생활을 중단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연주했다는 기록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평생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피아노 음악의 가능성을 넓힌 리스트는 1886년 여름, 감기에서 시작된 폐렴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