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걷기

중년에는 살롱으로 가라

송담(松潭) 2018. 8. 6. 19:55

 

중년에는 살롱으로 가라

 

 

 

죽설헌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나의 구속을 다 내려놓는 곳이 놀이터다. 놀이터는 등급이 여럿이다. 인간의 취향과 기질이 각기 다르고 처한 상황과 여건이 다르므로 놀이터도 다르기 마련이다. 우선 내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산천유람이 놀이이다. 외국에 나가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끊임없이 차창 밖을 본다. ‘저 산 모양이 둥그런 금체로구나. 삼각형의 문필봉이 저쪽에 있으니 저 반대쪽에서 어떤 인물이 나왔겠구나. 이 강물이 이렇게 돌아서 흘러가니까 저 강 안쪽에 있는 동네는 재물이 많겠구나하고 생각한다.

 

 외국에 나가서도 산천을 보며 풍수를 연구하는 게 놀이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이다. 다 의미가 있고, 거기서 태어나는 인물이 다르다. 이 풍수를 바탕으로 역사를 들여다본다. 과연 그런 인물이 태어났는가 살피고, 전쟁이나 역사적 전환기에 닥쳤을 때 이 동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지도자가 배출되었고, 어떻게 홍망성쇠를 이어갔는지가 탐구 대상이다. 탐구할 거리가 있으면 재미가 있다. 탐구심이 없으면 지루할 뿐이다. 문제는 탐구심이다. 이 부분이 선천적이다. 탐구심을 가지라고 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자들의 놀이터는 '살롱Salon'이다. 유럽의 문화에서 부러운 것이 이 살롱이다. 남자들끼리 모여서 장기도 두고 담배도 피우고 가볍게 술도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담론을 나누는 장소 말이다. 우리는 이게 없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겪고 산업화가 되면서 너무 먹고 사는 문제에만 골몰하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죽자 살자 달려만 왔다. 문득 오십 고개를 넘고 육십 고개가 앞에 보이니 지난 세월이 돌아봐진다. “, 해놓은 것도 없이 인생 헛살았다는 자탄이 온다. 이럴 때 모여야 한다. 살롱에서! 룸살롱 말고 말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이런 살롱을 간혹 만나곤 한다. 10여 년 전쯤 제천 박달재 고개 밑 시골마을에 판화 그리는 화백의 집에 들렀는데, 이 화백의 집이 살롱이었다. 동네 사람만 모여드는 게 아니었다. 요즘은 산골이라도 대개 자동차 길이 잘 닦여 있어서 전국에서 내방객이 왔다. 살롱의 조건은 문자향(文字香, 문자의 향기) 서권기(書券氣, 책의 기운)가 그 집에 꼭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게 빠지면 자칫 술판으로 흐를 수 있다. 문자향과 서권기가 살롱의 격조를 유지해 주는 앵커이다. 기준점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 하나, 살롱 주인의 인심이 후해야 한다. 사람 오는 것을 불편해하면 살롱 문 닫아야한다. 안주인의 역할이 크다는 말이다. 안주인의 인심이 좋으면 찾아간다. 전남 나주의 과수원 지대 복판에 있는 죽설헌竹雪軒도 이 일대의 살롱이다. 안주인이 털털하니 사람이 좋다. 손님들이 찾아가도 부담이 적다. 집에 들어가면 대나무 숲과 수십 종류의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서 서늘한 느낌을 준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중국 위진 시절 대나무 숲에 은거한 7)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싶다. 유리창 밖으로 비치는 대나무 숲을 보면서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이야기하고, 즐거운 농담을 하고 음악을 듣는다.

 

 경주의 황룡골에도 살롱이 하나 있었다. 초가지붕에 작은 방이 서너 개 있는 소박한 집이다. 독신인 집주인은 바둑을 좋아하는 거사居士이다. 무욕 담백한 성품에 차를 좋아한다. 손님이 차를 가지고 방문하면 좋아한다. 천년 도읍지였던 경주에는 켜켜이 문화가 배어있다. 지층에 그 문화가 시루떡처럼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경주 땅에 들어서기만해도 그 시루떡의 촉감이 전해져 온다고 할까. 황룡골 살롱은 경주의 촉감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곳이다.

 

 지리산의 칠불사도 살롱이다. 해발 700미터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칠불사는 부처님을 모시는 기도처이기도 하지만 김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도를 통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해발이 높아 여름에 특히 시원하다. 주지 스님 속이 좋아서 문화계 인사들의 발길이 잦다. 놀아도 절 안에서 놀면 그게 다 수행이 아니겠는가! 절 주위에 인공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온통 초록빛의 벽산(碧山)이 둘러싸고 있다. 그대로 마음이 초록으로 물든다.

 

 도시 사람들의 가장 평범한 놀이터는 술집이다. 술집 주인의 인상이 후하고 요리 솜씨가 있으면 일단 살롱으로서 자격이 된다. 인심 후하고 음식솜씨 좋은 술집이 어디 있는가? 요즘은 구경하기 힘들다. 주위를 둘러보니 놀러 갈만한 술집도 제대로 된 게 없다. 술은 많지만 술집은 없는 것이다.

 

 삶을 이야기하고 역사를 더듬어보고 철학을 토론할 수 있는 곳, 살롱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삶이 헛헛하지 않다.

 

 ‘조용헌의 인생독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