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에 관하여

전통 차 문화

송담(松潭) 2018. 6. 12. 09:08

 

전통 차 문화

 

 

조선 후기 차 문화를 보여주는 현재 심사정의 ‘송하음다’(松下飮茶·부분), 지본담채, 28.3×55㎝,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조선 후기 대표적 지식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유배 중이던 1805년 겨울, 혜장 스님(1772~1811)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차를 구걸하는 내용의 걸명소’(乞茗疏). 다산은 요즘 차에 빠져 있다목타게 바라는 내 뜻을 생각해 차를 보시하는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말한다. 전통차를 즐기는 다인(茶人)들과 차 연구자들 사이에 유명한 편지다.

 

 ‘걸명소에서 다산은 육우의 다경 세 편을 통달하고, 노동이 말한 일곱 잔의 차를 다 마시고 지낸다고도 했다. ‘육우의 다경은 당나라 문인 육우(733?~~804)의 저서 다경’(茶經)이다. 세계 최고의 차 교과서로 불리는 다경은 동양 차 문화의 뿌리로 평가받는다. ‘노동의 일곱 잔의 차는 노동(795?~835)이 차 마시는 즐거움을 시로 표현한 다시(茶詩)들 가운데 칠완다가’(七碗茶歌)를 언급한 것이다.

 

 첫 잔은 입술과 목젖을 적시고

 둘째 잔은 근심을 씻어주네

 셋째 잔은 삭막한 마음을 더듬어 책 오천 권의 문장을 떠오르게 하고

 넷째 잔을 마시니 살짝 땀이 나는 듯하며 불편스러운 일들 모두 땀구멍으로 사라지네

 다섯째 잔은 뼛속까지 맑게 하고

 여섯째 잔을 마시니 신선과 통하네

 일곱째 잔은 아직 마시지 않았는데도 겨드랑이 사이로 맑은 바람이 이는 것을 알겠네.

 

 차 문화는 다도’(茶道)로까지 이어졌다. 나아가 그들은 시를 지었고, 글을 썼으며, 그림(다화·茶畵)으로 승화시켰다. 조형미 돋보이는 수준 높은 다구들도 남겼다. 그것들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정서와 가치관, 생활상이 녹아들어 있다. 전통차 문화는 전통의례나 당시 지배·엘리트 계층의 생활문화상 연구에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전통차 문화의 하나인 차를 만드는 제다’(製茶)가 국가무형문화재(130)로 지정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 1000여년을 이어온 향기

 

 한반도 차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1000년을 훌쩍 넘어선다. 종주국이라 할 중국에서는 기원전 700년대 춘추시대까지 거론된다. 한반도에 차가 들어온 것은 중국 전래설, 자생설, 가야로 온 인도 전래설 등이 있다.

 

 문헌기록으로는 <삼국사기>가 대표적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흥덕왕조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 씨앗을 가져와 왕이 지리산에 심도록 했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통일신라 말기의 선종(禪宗) 확산과 더불어 차 문화가 성행했고, 경주의 월지(안압지)에서는 자가 쓰인 당시 토기도 발굴됐다.

 

 삼국시대의 차는 현재 보편적인 덖음차라기보다 찻잎을 쪄 빻아 형태를 고정시킨 덩어리차(떡차)로 보인다. 문화재청의 분류에 따르면, 차나무의 새순과 잎을 따 찌거나 덖거나 발효시켜 만드는 차(제다)는 찻잎 형태가 거의 그대로 있는 덖음차(오늘날 흔히 보는 잎차), 잎을 쪄 빻아 여러 모양으로 건조시킨 떡차, 발효차로 나눌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덩어리차를 즐기는 문화가 성행했다.

 

 제다 등 차와 관련된 전 분야가 활성화되면서 융성한 차 문화는 흔히 다반사’(茶飯事)라는 말로 표현된다. 당시 대표적 다인인 이규보(1168~1241)의 다시에는 덩어리차를 갈기 위한 차맷돌도 언급된다. 차와 선()이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 그는 차맷돌을 선물받고 맷돌을 돌리니 향기롭고 푸른 가루 날려 고마움이 더 깊다고 읊었다. 강화도 선원사, 청주 사뇌사 터 등에서는 차맷돌로 추정되는 작은 맷돌이 발굴됐다.

 

 당시 차 문화는 왕실과 귀족, 승려 등 지배층이 이끈 수준 높은 문화였으나 한편으론 지나친 사치로까지 나가 비판받기도 했다. 이런 비판은 조선시대에도 일부 이어져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지적이 일었다.

 

 조선 전기까지 고려의 차 문화는 왕실과 사대부 지식인, 사찰들을 중심으로 계승됐다. <세종실록지리지> 등에는 고려 때부터 이어져온 차 산지가 기록돼 있는데, 강진·장흥·순천·하동 등 35곳이다. 사대부들은 많은 시서화를 남기기도 했다. 매월당 김시습이 직접 차나무까지 키우고, 차를 만들어 즐겼다는 것은 다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서거정은 매월당이 만든 차를 선물받고 향과 색, 맛이 기릴 만하고 마음이 열려 상쾌하니 신기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쇠락의 길에 들어선 차 문화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후기에 다시 부흥한다. 그 중심에는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 스님(1786~1866)이 있다. 대흥사 일지암을 주석처로 삼은 초의 스님은 제다법, 끽다법 등을 정립했고, ‘한국판 다경이라는 동다송’(東茶頌)을 쓰고, ‘다신전’(茶神傳)을 엮어냈다. 사대부 지식인과 스님들을 중심으로 당대를 풍미한 차 문화는 일제강점기와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부침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 차 한 잔에 담긴 숱한 의미

 

 차는 단순한 마실거리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았다. 조상들에게, 부처에게 올리는 귀한 공양물이고, 스승과 제자가, 마음이 통하는 벗들끼리 소중하게 주고받는 선물이었다. ()과 다름없는 수행이자 수양의 매개물로 한 잔의 차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살피는 성찰행위 그 자체였다. 요즘의 힐링이자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다는 시구처럼 소통의 상징이었다.

 

 차의 문학적 결실은 조선으로 이어져 양다’(養茶) ‘작설’(雀舌) 등의 시를 남긴 김시습을 비롯해 김종직, 이목, 남효온 등의 다시가 전한다. 후기에는 혜장·초의·범해 스님 등 이른바 다승’(茶僧)과 정약용, 신위, 김정희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 사대부들의 차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다화도 많다. 차가 아예 주제이거나 하나의 소재로 등장하는 그림들이다. 심사정의 송하음다’(松下飮茶·소나무 아래서 차를 마시다)를 비롯해 이경윤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등이다.

 

 서예작품으로는 추사 김정희가 초의 스님에게 차를 선물받고 썼다는 茗禪’(명선)이 있다. 차 문화 발전은 다구 발달로도 이어진다. 다구는 소유자의 취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공예품이자 당대의 조형미와 정서를 표현한다. 차 문화는 또 다실이나 다실에 접하는 정원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찻물의 중요성으로 전국 물에 대한 품평을 낳기도 했다.

 

 전통적 차 문화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왔고, 중국·일본 차 문화와는 다른 고유한 특성들도 지니고 있다. 나아가 형식과 내용에서 많은 변화가 있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차 문화는 계속되고 있다.

 

도재기 / 선임기자 (2018.6.9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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