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묘비명을 남기고 싶지 않은 까닭
내가 처음 죽음을 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열여덟 살이 되던 해였다. 바로 위의 둘째 언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나는 오랫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많이 방황해야만 했다. 그런데 세월은 모든 것을 덮어 희미하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 언니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언니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언니의 죽음은 내 인생을 통째로 흔들었는데 언니의 죽음도, 그때 느꼈던 감당할 수 없는 슬픔도 이제는 오래된 흑백영화처럼 기억의 창고에 먼지가 쌓인 채로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내 기억 속의 언니는 늘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사춘기 소녀였고,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고 나와 약속했던 당당하고 꿈 많은 소녀였다. 그런데 나는 그로부터 40여 년을 혼자 걸어와 할머니가 되어 기억의 책장을 넘기고 있다. 아마도 나마저 죽으면 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언니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사라질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생애만큼만 기억되고,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의 무게만큼만 존재할 것이다. 그 후엔 나 또한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역사란 시간의 흐름 속에 무수한 형태의 삶이 있었고 그들의 삶을 대변해 주는 무수한 묘비명이 있을 텐데 굳이 나까지 보태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나중에는 묘비가 처리 곤란한 쓰레기 밖에 더 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허무하다거나 사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무게가 바로 삶의 무게를 재는 척도가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죽으면서 가지고 가는 것은 기억뿐이다. 삶의 마지막에는 결국 영광도 돈도 명예도 아닌 그동안 소중한 사람들과 쌓아온 기억만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것이다. 그동안 잘 살았는지, 잘못 살았는지 말해 주는 것도 우리가 간직한 기억의 합일뿐이다. 그렇다면 이 시간에도 지금 내 모습은 나를 아는 이들의 마음속에 기록되고 있고, 훗날 그들이 나를 기억할 때 떠오르는 모습이 곧 내가 될 것이다. 굳이 남기지 않아도 나는 지금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묘비명을 새기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묘비명을 남겨야 할 이유가 없을 수밖에 없다. 대신 나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숨을 거둔 순간 비로소 이 생에서의 나의 삶 또한 완전히 마감하게 될 것이다.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 사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섯 살 소녀 엘레나. 가장 큰 소망은 엄마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 소망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며, 그림 그리기와 도서관 가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엘레나는 생일을 며칠 앞둔 2006년 11월에 소아 뇌종양 관정을 받는다. 엘레나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200여 일뿐. 부모인 데저리크 부부는 깊은 슬픔에 잠겼지만 엘레나는 아픈 와중에도 늘 씩씩했다.
결국 엘레나가 하늘로 떠나고 슬픔에 잠겨 있던 데저리크 부부는 어느 날 놀라운 쪽지를 발견한다. 엘레나가 하늘로 떠나기 직전까지 9개월 동안 아무도 몰래 가방과 서랍장, 책장, 찻장, 앨범 등 집안 곳곳에 수백 장의 쪽지를 숨겨 둔 것이다. 자신이 떠난 뒤에 가족들이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그레이스, 미소 지어! 선생님 말씀 잘 들어”, 그리고 마지막 힘을 쥐어짠 듯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남긴 말 “아파서 미안해요.”
데저리크 부부는 어린 엘레나에게 차마 죽음이 기다린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암의 진행으로 목소리를 잃고 오른손도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된 엘레나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 남겨진 가족들이 슬퍼할 것을 걱정하며 그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그렇게 남긴 것이다.
아픈 와중에도 남겨질 가족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사랑의 쪽지 선물을 전하고 떠난 여섯 살 꼬마 엘레나.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나는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은 그녀의 시 '불쌍한 여인'에서 죽은 여자보다도 더 불쌍한 여인은 잊힌 여인이라고 말했다. 이는 아마도 살아 있으면서 잊힌 여인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고, 누구와도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한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들 하나하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 속에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남아 있기를 희망하며, 그래도 함께해서 좋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김혜남 / ‘당신과 나 사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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