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기억에 나를 심다
이미지 출처 : 장재선의 문화노트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문인수 시인의 ‘하관’ 전문
도공이 도자기를 정성스레 굽듯, 시인은 말을 아름답게 굽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까지 다가가 삶의 본질을 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시인을 볼 견見자를 써서 견자見者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발견하는 능력, 시의 치유력은 바로 거기에서 생겨납니다.
문인수 시인의 시 ‘하관’을 읽다가 ‘아, 정말 시인의 마음속 눈은 남다르구나’라고 감탄했습니다. 어머니를 묻지 않고 심다니요, 꽃을 심듯 심다니요. 죽음을 묻는다는 것은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단절의 의식입니다. 시신을 묻고 유품을 묻고 기억을 묻고 이승의 인연을 묻습니다. 그리고 잊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 산 자는 산 자라는 나눔을 통해 산 자신의 잊음을 정당화합니다. 주변 사람들도 슬픔에 머물지 말고 어서 툴툴 털고 일어나 열심히 살아가라고 격려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르게 말합니다. 어머니를 심습니다. 그리움을 심습니다. 추억을 심고 기억을 심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심습니다. 그렇게 심은 어머니는 봄이 오면 앞산의 꽃으로 피어나고 여름이 오면 뒷산의 나무로 자라나고, 가을이 오면 빨간 단풍으로 물들다가, 겨울이 오면 수북한 함박눈으로 내릴 것입니다. 살아서 어머니는 자식에게 생명을 주고, 죽어서 어머니는 자식에게 심어져 영원한 삶을 받습니다. 오래전 어머니를 잃은 자식에게, 언젠가는 어머니를 잃을 모든 자식에게, 또는.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부모님에게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언어인가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시인이 진정 바라는 것은 어머니의 윤회가 아닙니다.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자신의 어머니로 태어나달라는 힌두이즘적 소망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살아생전 우리 어머니 좋은 음식 하나 편히 드시지 못하고 고운 옷 하나 제대로 입어보지 못한 인고의 날들을 자식은 너무나 잘 일기에 다시 또 사람으로 그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말라고 간구합니다. 오히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열반,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꽃으로조차 피어나지 말고 영면하시라고 어머니를 심으며 곡진하게 기도합니다. 피어나는 것은 자식의 기억 속에서일 뿐, 어머니는 이 고통의 바다에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편안한 슬픔과 안온한 그리움이 이 시에서 잔향처럼 오래 전해집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곤혹했던 기억을 꼽으라고 한다면 몇 년 전 겨울, 친구의 조사弔詞를 썼던 일이었습니다. 친구는 마흔일곱에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은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어린아이들은 아빠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황망하게 장례를 치렀고, 49재 때 저는 작가라는 이유로 친구를 보내는 글을 쓰고 읽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두 번 죽 다고 한다. 한 번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생명의 정지, 그리고 또 한 번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 아이들아 너희가 계속 아빠를 기억하는 한, 아빠는 계속 너희와 살아계신단다.” 당시는 왜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지, 오히려 알량한 저의 글재주가 원망스러웠는데 몇 년이 지나 그 아이가 군인이 되고, 휴가를 나와서 저를 찾아 와 말했습니다. “그때 아저씨가 해주셨던 그 말씀이 슬픔에 빠져 있던 우리 가족에게 큰 힘이 되었어요.”
문인수 시인의 시 ‘하관’ 속 ‘심는다’는 표현을 보면서 명상적 감동과 함께 떠오른 기억 한토막입니다. 심었던 모든 것이 대지로 솟아나는 생명의 봄이 다가옵니다. 나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심겨 있을지, 이웃과 세상을 위해 어떻게 나를 심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봄을 맞이하는 고운 자세일 것입니다.
윤용인 ddubuk 1 @naver.com
공무원 연금 2018. 3월호
'어떻게 살 것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묘비명을 남기고 싶지 않은 까닭 (0) | 2018.05.13 |
---|---|
삶의 빚을 덜기 위하여 (0) | 2018.04.18 |
영혼을 다독이는 방법 : 공감과 사랑 (0) | 2017.12.31 |
버킷 리스트(Bucket List) (0) | 2017.12.21 |
천천히 오시게나 (0) | 2017.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