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천천히 오시게나

송담(松潭) 2017. 12. 15. 05:46

천천히 오시게나

- 저승에서 온 답신 -

 

전병삼

 

이미지 출처 : 독서캠퍼스

 

 

 며칠 전, 불현듯 그동안 가까이 지내던 녀석들이 생각나 전자우편 주소를 뒤적여 몇 놈들에게 소일 삼아 안부 편지를 띄웠었어. 그런데 한밤중, 비몽사몽 중에 돌연히 한 녀석으로부터 답장을 받은 게야. 하도 수상한 꿈이라서 깨어나자마자 어쩌면 그리도 또렷하게 나풀대는 글귀들의 꼬리를 꼬옥 붙잡은 채로, 커튼 올 사이를 비집고 스며드는 희읍스레한 가로등불 속에서 머리맡 메모지에다 휘갈겨댔지. 머릿속을 생생하게 맴도는 줄거리는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몇 군데를 부드럽게 다듬거나 시적인 수사를 약간 섞어서 미루어 보태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사연이야.

 

 친구 아직도 날 기억하고 있구먼!

 푸근한 정이 밴 안부 편지 잘 보았다네.

 깨질세라 부딪치던 술잔 소리 새록하이.

 잊지 않고 연락주다니 참으로 고마우이.

 이게 다 속진의 실낱 인연이던가, 하지만

 난 이미 이승 인간이 아닐세그려

 지금 저승에서 아주 평온히 지낸다네.

 이곳은 토록 갈망하던 천국도 극락도 아니요,

 떨어질까 애태우던 연옥도 지옥도 아닐세그려.

 검지도 희지도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여기는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노여움도 모르고

 화냄도 두려움도 좋음도 미움도 모른다네.

 시뻘건 목젖 드러내 가가대소할 핑계는커녕,

 목줄기 핏대 세워 소리칠 털끝 구실도 없다네.

 숨을 쉬는 것도 아니고 멈춘 것도 아니요.

 눈을 뜬 것도 아니고 감은 것도 아니라네.

 부귀도 부질없고 야망도 헛되고 헛된 것을……

 너무 긴 얘기를 주절대야 시간이 아깝겠지

 아무튼, 내가 너무 서둘러 이리로 왔구먼.

 자네 숨결은 아직도 고래심줄로 팽팽하네그려.

 한낱 풀잎 이슬 같은 게 인생이런데, 그래도

 미련 둔 일들이 얼마쯤 남아 있을 모양이니,

 고루고루 챙기면서 한껏 버둥거려 버텨보시게.

 기껍고 유쾌한 일 있거들랑 미련 없이 즐기시게

 절대로 조급히 재촉하지도 서두르지도 말고

 느릿느릿. 황혼녘 황소걸음으로 천천히 오시게나.

 밤안개 속, 흔적들이 어렴풋이 아련하구먼.

 만나고 싶던 친구, 소식 줘서 진정으로 고마우이!

 

 나는 늦잠에서 깨자마자 부랴부랴 동창회 총무에게 전화를 걸었어. 역시 그렇더군. 그 친우는 안타깝게도 몹쓸 병마와 씨름하다가 얼마 전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게야. 뒤늦게 확인이 돼서 알리지도 못했다며 자못 물기 젖은 목소리였어.

 

 녀석과 허물없이 희희낙락하던 장면들이 깔끄러운 아침 밥알마다 총총히 박혀 들어서 자꾸만 목젖을 뜨끔뜨끔 찌르던 걸.

 

 - 에이, 그래도 참 섭섭하구먼.

 몇 해라도 더 술잔을 부딪치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훌쩍 먼저 가긴가....

 그래도 평온히 지낸다니 다행일세그려.

 극락이든 천당이든 저승엘 갔다가 되돌아온 사람 전혀 없으니,

 그곳 형편을 내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하랴만 친구야,

 이승 걱정 모두 다 잊고 근심 없을 그 세상에서

 부디부디 태평하게 지내시게나!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연간사화집 2017/2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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