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왜 창조인가, 왜 인간이 창조를 말하는가.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죽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창조의 욕망입니다.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창조력입니다. 문학을 하게 된 것도 그리고 마지막에 세례를 받게 된 것도 아마 여섯 살 때 체험한 메멘토 모리의 말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메멘토 모리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온다.
아무리 부드러운 포대기로 감싸도
수의(壽衣)의 까칠한 촉감은 감출 수가 없어
잠투정을 하는 아이의 이유를 아는가
한밤에 눈을 뜨면
어머니 숨소리를 엿듣던
긴 겨울밤
어머니 손 움켜잡던
내 작은 다섯 손가락
애들은 미꾸라지 잡으러 냇가로 가고
애들은 새둥지 따러 산으로 가고
나 혼자 굴렁쇠를 굴리던 보리밭 길
여섯살배기 아이의 뺨에 무슨 연유로
눈물이 흘렀는가
너무 대낮이 눈부셨는가
너무 조용해 귀가 멍멍했는가
굴렁쇠를 굴리다 흐르던 눈물
무엇을 보았는가
메멘토 모리
훗날에야 알았네
메멘토 모리
'메멘토Memento’ 는 라틴어로 ‘기억하다,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리Mori’는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메멘토 모리’라는 말은 ‘죽음을 생각하라’ ‘죽는다는 걸 생각하며 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앞의 시에서 쓴 그대로 친구도 없이 혼자서 대낮에 보리밭 길을 굴렁쇠를 굴리며 지나가다가 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싸운 것도 아니고 돌부리에 차인 것도 아닙니다. 귀가 멍멍하도록 고요한 대낮 새하얀 햇빛 한복판에 서서 아무 이유 없이 뺨을 타고내리던 눈물방울을 느꼈지요.
생각해보세요. 학교에도 들어가기 전 여섯 살짜리 아이가 무엇 때문에 울었을까요. 그리고 비밀처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것을 혼자 마음속에 간직해왔을까요. 대체 그 대낮의 허공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요. 이유도 없이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말하는 죽음이란 숨이 멈추는 육신의 죽음만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죽음은 손에 잡히는 모든 것과 그 관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지요. 색채가 있는 것, 형태가 있는 것, 숨쉬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힘껏 잡아도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 같은 것이지요.
메멘토 모리 는 나와 나 아닌 사람, 그리고 나와 나 아닌 사물들과의 거리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요. 아이에게는 신과 다름없는 어머니와 나 사이에도 거리가 있다는 것을 그날의 눈물이 가르쳐준 것입니다. 밤에 혼자 눈을 뜨면 어머니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고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벽시계의 시계추 소리만이 들려왔지요. 그럴 때면 몰래 주무시는 어머니의 코에 고사리같이 작은 손을 대봅니다. 그러고는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 나서야 안심하고 다시 잠이 듭니다.
죽음의 의식 없이는 생명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죽는다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말끝마다 좋아 죽겠다고 하고 슬퍼 죽겠다고 하고 우스워 죽겠다고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배고파 죽겠다고 하고 배가 부르면 이번 에는 배불러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 처음에는 그런 동족들이 싫고 부끄러웠지요. 하지만 죽음은 삶의 극한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메멘토 모리라는 것을 알았지요.
‘살기죽기'라고 하지 않고 '죽기살기'라고 말하는 사람들, "To be or not to be" 햄릿 대사도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라고 번역하는 사람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한국인이야말로 메멘토 모리의 철학적 종교적 민족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라틴어로 말하면 의미심장한 철학적 언어요 종교적 잠언으로 들리고 한국말로 좋아 죽겠다고 하면 속된 생각, 부정적 의미로 생각해온 것이 우리의 과오였던 것입니다.
남의 나라 말에는 자기가 죽는 것과 남을 죽이는 것이 확연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한자어를 보세요. 죽는 것은 ‘사(死)’이고 죽이는 것은 ‘살(殺)’이지요. 일본어로 죽다는 ‘시누死ぬ’이고 죽이는 것은 고로스입니다. 영어는 'die'와 kill', 불어는 ‘mourir’와 ‘tuer’지요. 그런데 유독 한국말에는 그렇게 죽는다는 말을 많이 쓰면서도 ‘살(殺)’ '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죽인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할지 모르나、죽인다는 죽다의 사역동사였던 것입니다. ‘먹다’와 ‘먹이다’처럼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널 죽인다'고 하지 않고 '너 죽을래’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순수한 ‘살해殺害’에 해당하는 말은 한자어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감동적인 순간, 최고의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순간, 한국의 아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인다' ‘죽여준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때 굴렁쇠를 굴리던 여섯 살짜리의 종교적 충동을.
끈을 잘라라
개목걸이 같은 끈이 속박하거든
그 끈을 끊어버리라
묶지도 말고 묶이지도 말라.
교토에 와서 생활 패턴이 바뀌었습니다. 아침 산책을 시작한 것입니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심호흡을 하면 기도로 흘러 들어가던 공기 방울들이 폐부에서 터지는 감촉을 느낍니다. 기체로 변한 청량음료입니다. 지난밤 교토콘서트홀에서 들었던 제르킨의 피아노 소리를 다시 듣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침 햇살은 브람스의 피아노 콘체르토,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을 뚫고 갑자기 솟아나는 금관악기처럼 투명하고 눈부십니다.
하지만 연구소 뒷문 산모롱이 길에는 개를 끌고 나온 아침 산책객들로 붐빕니다. 약속이나 한 듯이 몸집이 작은 사람은 도사견같이 큰 개를, 몸집이 큰 사람들은 발바리 같은 작은 개를 끌고 나오는 것이 이상합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산책길에서 마주쳐도 예외 없이 골난 사람처럼 외면을 하지만 개들끼리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짖으며 달려가거나 싸움을 걸고 등에 올라타려고 혹은 빙빙 돌면서 서로 냄새를 맡으며 떠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젊은이든 노인이든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개를 끌고 온 산책객들의 보행은 개의 걸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개가 길거리에 떨어진 것을 보고 냄새를 맡을 때, 그들은 걸음을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개를 보고 달려가면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잡아당기지만, 역시 그들의 걸음은 개의 의지를 거스르기 힘듭니다. 개가 오줌을 눌 때마다 주인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도 시간을 배설해야 합니다. 칠성사이다의 포말 같던 아침 공기는 금시 오염되고 말지만 주인은 습관이 되어서인지 코를 막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개가 볼일을 다보고 나면 개똥을 치우기 위해 준비해 온 휴지를 펴들고 익숙한 솜씨로 뒷시중을 들기도 합니다. 누가 주인인지 구별하기 힘듭니다.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 산책은 집 안에만 갇혀 있는 애완견에게 배설과 운동을 시키기 위해서 계획된 것일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서로가 서로를 묶는 하나의 끈에 매달려 그들의 아침 산책은 즐겁고 행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들처럼 끈에 매달려 살고 있지요. 나는 종교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속에 얽매인 끈에서 벗어나 영혼을 해방시키려는 욕망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소유의 끈, 정의 끈, 육신의 끈, 모든 욕망의 끈을 놓아야만 합니다. 내가 망명객처럼 잠시 내 집과 내 나라를 떠나 이곳에 온 까닭도 그러한 목걸이의 끈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같았으면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시선의 구속을 느꼈겠지만 여기에서는 아주 자유롭습니다. 누구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들개처럼 뛰어다닐 수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 산책길에서 숲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목수가 아니 라는 것을 신에게 감사합니다. 목수들은 숲을 보지 못합니다. 나무에서 기둥과 서까래, 책상이나 의자를 봅니다. 목재상들은 수직의 나무를 쓰러뜨려 뗏목을 만들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도시로 운반합니다. 인간이 자연물을 무엇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개목걸이의 끈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플라톤이 한 말인가요. 바람 자체가 진짜로 찬지 따뜻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데아를 알아야 한다고 했지요. 그에 따르면 바람은 더 이상 자연의 힘으로 이해되지 않고 오로지 따뜻함과 시원함에 대한 인간 욕구와 관련해서만 의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도 바람을 방앗간지기처럼 풍차를 돌리는 바람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듯이 나는 숲들을 쓰러진 뗏목으로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나는 나무들을 자유로운 거리에서 바라볼 수가 있듯이 이국의 모든 풍경과 뉴스, 이방의 사람들을 아무 부담 없이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토 생활을 하는 지금의 내 행복입니다. 도구가 아닌 존재의 나무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하나하나의 이파리에 묻어나는 여름과 조금씩 물들어가는 겨울의 죽음들이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무들이 미친 듯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나무 이파리 하나하나가 말갈기처럼 흔들릴 때 , 비로소 나무는 무엇으로도 풀이 할 수 없는 나무 자신의 생명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지 겨우 하루가 지난 그때부터 새로 만나는 사람과 새로 구한 물건들로 나에게도 개목걸이의 끈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무리 버리고 버려도 쓰레기통을 비우고 또 비워도 하루치씩 온갖 생의 찌꺼기들이 쌓여갑니다.
미구에 쓰레기가 될 물건들이 내일의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인간의 끈입니다. 사람들을 피해 이곳에 왔는데 사람들이 그리워 치와와 같은 애완용 개의 목줄을 구하러 다닙니다. 개를 끌고 산책을 하는 저 많은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나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쌀 한 자루 영혼 한 자루의 무게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1>은 내가 세례를 받기 3년 전 2004년 일본 교토에서 쓴 글입니다. 남들은 시라고도 하고 기도라고도 하지만 그저 내적 독백을 메모지에 옮겨놓은 글이었지요. 슈퍼에 가서 장도 보고 밥도 지어 먹으면서 부산 피난 시절의 학생 때처럼 혼자 지내던 때의 일입니다. 하지 않던 일이라 힘도 들고 혼자 지내는 것이 무척 외로웠나봅니다.
더구나 그날 저녁, 슈퍼에서 싸게 파는 특상품 쌀을 보고 앞뒤 가릴 새 없이 자루째 사들고 나온 것이지요. 택시로는 너무 가깝고 걷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습니다. 그런데도 택시를 타면 싸게 산 쌀값의 의미가 없어지니까 객기로 숙소까지 걷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손에 든 쌀가루는 그냥 찬바구니가 아니었지요. 손에 들어도 어깨에 메어도 점점 무쇠처럼 무거워졌어요. 게다가 숙소 건물은 한 걸음 다가가면 두 발짝 물러선다는 마법의 성처럼 보였습니다.
연구소의 숙소는 산기슭의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얼마나 외지고 황량했으면 외국인 교수들이 <마의 산>에 나오는 사나토리움이라고 불렀겠습니까. 그래요. 정말 연구소와 외국인 교수 아파트 건물은 꼭 인가로부터 격리된 수용소처럼 보였습니다. 더구나 주말이면 연구소와 숙소 건물 전체가 텅 비었지요.
그날따라 저녁에 빨리 땅거미가 졌고 시가지에서 올려다보이는 산 모통이 어둠 속에는 내 방 창문의 불빛밖에는 보이지 않았지요, 남의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어두워져야 슈퍼에 갔고 돌아올 때 빈방의 어둠이 싫어서 불을 켜 놓고 다녔던 거지요. 그래서 외출했다 돌아올 때면 나는 늘 내 빈방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며 밤길을 걸었지요.
그날 밤도 그랬어요.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어깨를 짓누르는 쌀자루였지요. 어느 철학자인가가 “사람이 걷는 것은 다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맞아요.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급한 마음 때문에 나는 그냥 감각도 없는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도둑처럼 쌀자루를 지고 밤길을 걷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내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지요. 하지만 내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분명 웃음이 아니라 한숨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비틀거리며 여기까지 걸어온 자신의 발소리를 그제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던 겁니다. 대체 이 쌀자루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나 되는 것일까. 평생 읽은 책 무게. 평생 써온 원고지와 컴퓨터의 A4용지, 그 속에 담긴 문자와 정보의 무게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그 쌀자루의 무게에 비해 내 영혼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멕시코의 감독이 만든 〈21그램>이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인간 영혼의 무게는 라면 한 젓가락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이 있지요. 실제로 미국 매사추세츠 병원에서는 임종 직전의 말기 결핵 환자를 대상으로 3시간 40분 동안 체중의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숨을 거두는 순간 그 환자의 몸무게가 1.25온스(35.4g) 줄어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봅니다. 최근에도 스웨덴의 룬데 박사팀이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그 실험의 진위를 검증해 보았더니 임종시 환자의 체중 변동은 21.26214그램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왔는지는 몰라도 겨우 문 앞에까지 이르러서야 나는 쌀가루를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어요. 아무도 없는 빈방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초인종을 눌렀지요, 그러면 누군가 반갑게 뛰어나와 문을 열어주고 어서 오라고 얼마나 고생했느냐고 역성을 들어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미친 짓이지요. 빈방에서 사람이 나올 리 있겠습니까. 초인종을 누르면 누군가 기다리다 문을 열어주는 이 작은 행복조차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제 손으로 교도소 쇠문과 같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지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내 썰렁한 방안을 휘 둘러보았습니다. 별처럼 보였던 불빛도 방 안에 들어와 보니 초라한 그냥 전등불이었지요. 늘 보던 그 방이 쌀자루 때문인가 더욱 좁아 보였고요 짐을 내려놓았는데도 이번에는 방 안의 모든 세간들이 날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처음 한국을 떠나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사방의 벽뿐, 아무 물건도 놓여 있지 않았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온 방안에는 책이며 책상이며 TV며 그리고 플라스틱 주방용품까지 살림도구들로 꽉 차 있었던 겁니다. 물건을 많이 들여놓을수록 내 몸이 쉴 빈자리는 그만큼 사라지게 된다는 평범한 상식을 그날에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방을 가득 채우고서도 나를 구속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빛이고 향기이고 바람과 같은 공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래요. 이 방안을 물건이나 내 몸뚱아리로 채울 것이 아니라 빛과 향기와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은 영혼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한 번도 펴보지 않던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마태복음 11:28)
전등불이 다시 별빛으로 보였습니다. 컴퓨터가 놓인 책상이 제단으로 보였습니다. 아무 장식도 걸리지 않은 벽이 장막처럼 쳐져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무신론자들도 기도를 드린다는 모순어법을 그때 찾았습니다. 쌀 한 자루의 무게와 영혼의 무게를 그때 처음으로 저울질해보았습니다. 빛의 무게, 향기의 무게, 공기의 무게, 영혼의 무게는 그냥 가벼운 것이 아니라 하늘로 상승하고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은 쌀자루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지만 오히려 이 무신론자는 무거운 쌀자루를 비우고 내려놓기 위해서 그리고 방 안의 물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올렸던 겁니다. 쓰레기가 쌓여가는 내 방을 빛과 향기로 채우기 위해서 그리했던 것이지요.
이어령 / ‘지성에서 영성으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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