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은폐된 문명으로부터의 자유
사진출처 : 다음블로그
영원이라는 말은 순간이라는 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순간은 영원을 뒤에 두고 한 말이며, 영원은 순간을 앞에 두고 한 말이다. 이처럼 죽음 또한 삶과 더불어 짝을 이룬다. 죽음은 삶을 상정하고, 삶은 죽음을 상정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 따라서 실존에서의 영원은 죽음을 동반해야 가능하다.
<악의 꽃>을 쓴 보들레르는 삶 속에서 영원을 본 시인이다. 그는 “삶이 드러내는 ‘저 너머’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우리들 불멸의 가장 생생한 증거이다. 시에 의해, 그리고 시를 통해서, 또한 음악에 의해, 그리고 음악을 통해서, 영혼은 무덤 뒤의 찬란함을 엿본다”라고 말한다. 예술로써 삶과 죽음을 하나로 응시한 것이다.
글쓰기의 한계를 느낀 제자에게 죽음을 생각해보라고 했다는 김동리의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예술의 보편성과 죽음의 보편성은 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은 완전한 평등이다. 왕후장상이 따로 없으며, 재벌과 노동자, 성직자와 신도, 동과 서, 남과 북을 따지지 않는다. 과연 자연이 준 인류 최고의 선물은 죽음이다. 죽음에 이르러야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삶을 통찰한다. 유사 이래 그것들이 죄다 기록되어 전해졌다면, 인류 문명은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역사를 보라. 태양 아래 영원한 것은 없듯이 흥망성쇠가 역사의 법칙이다. 흥할 때 쇠함을 알고 준비했다면 로마도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비에트가 1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평화를 관장하는 팍스(Pax)라는 여신은 결코 자신의 이름을 붙인 자의 패권을 용납하지 않는다. 세계의 어떤 권력과 국가도 영원히 이 여신을 소유하지 못했다.
하물며 인간 또한 춘하추동과 같이 탄생과 성장과 갈무리와 죽음의 연속 아래에 있다. 새순은 마른 가지를 딛고 돋는 것이 순리이다. 우리는 죽음을 사는 것이다. 우리 몸의 세포 또한 죽음과 탄생을 통해 수년에 걸쳐 교체된다. 어제의 나는 이미 사라지고 늘 새롭게 탄생한다. 역으로 철학자 푸코는 병동에서 기껏해야 삶은 서서히 죽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현대문명은 죽음이 없다. 기업, 정부, 군대, 그리고 종교마저도 늙음을 몰아내고 온통 젊음으로 지탱하고 있다. 노동력이 다한 삶은 폐품처럼 처리된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도시는 조명으로 밤에도 낮을 강요한다. 이 특이한 문명은 오직 성장만을 위해 젊음이 지배하도록 사주한다. 그 결과, 우리는 죽음의 철학자 장켈레비치가 말하는 제3인칭의 죽음에 대해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자신과 친지의 죽음인 제1·2인칭의 죽음에는 그토록 민감하면서도 저 멀리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일어나는 그와 그녀의 비참한 죽음에는 동정의 여지조차도 없다.
이제 죽음이 은폐된 TV 드라마와 광고는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은 배우로 가득 차 있다. 배우가 늙으면 새로운 젊은 배우로 화면을 교체한다. 늙음과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욕망의 마케팅이다. 소품의 노인은 남고 나머지는 사라진다.
그런데 종교는 죽음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 아닌가. 가톨릭과 기독교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갱생을 찾는다. 죄로 얼룩진 생을 청산하고 거듭난 삶을 성당이나 교회에서 확인한다. 불교나 원불교 또한 윤회로써 생이 연속된다. 지나 서미나라는 <윤회의 비밀>을 통해, 윤회는 지정의 삼방면의 성숙을 위해 있다고 인류학적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윤회를 따르자면, 이 세계는 하나의 배움의 학교일 따름이다. 이생이 중학교이면 다음 생은 고등학교이며, 이생이 고등학교이면 다음 생은 대학교인 것이다. 우리 영혼은 우주라는 광활한 학교에 속한 학생이다. 따라서 임종을 맞이해 보살핌을 받는 터미널 케어는 마땅히 다음 생을 준비하는 스타팅 케어가 되어야 한다.
<벽암록> 43칙에서 한 스님이 동산양개 선사에게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닥칠 때는 어떻게 피합니까.” 선사는 “어째서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으로 가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다시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곳이 어디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추우면 너를 얼려 죽이고, 더우면 쪄 죽이지”라고 대답했다.
생사가 반복되는 이 세상에서 생사가 없는 곳은 어디냐는 질문에, 동산 선사는 생사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된다고 했다. 그곳이 어디냐고 묻자 동산 선사는, 살아 있을 때는 철저하게 삶에 충실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하게 충실하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 죽기 3일 전 남긴 “이생은 멋진 여행이었다. 다음 생은 어떤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라는 어느 묘비명을 본다면, 이 문명의 부조리와 불량함에 어찌 내가 구속당할 것인가.
원익선 / 원광대 정역원 교무
(2017.6.24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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