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늙음은 늘 남의 것이었다. 젊은 싯다르타 왕자는 어느 날 길에서 만난 노인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라고 외쳤다지만, 평범한 젊은이들의 눈에 노인은 본디부터 노인이었을 것만 같고 나와는 도무지 무관한 존재로 보이기 마련이다. 젊었을 때 그렇게 늙어 보였던 사람들의 나이가 오늘 나의 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늙어감은 이미 시작되어 버렸고, 앞으로도 진행만 있을 뿐 돌이킬 수는 없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늙어감 앞에서 옛사람들은 자위와 해학이 담긴 시를 짓곤 했다. 소세양은 머리가 벗겨지니 복건을 쓰기 편해 좋다며 호기를 부렸고, 이만백은 이가 빠졌으니 씹지 않고도 넘길 수 있는 술을 즐길 이유가 더해졌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앞니 하나가 갑자기 빠진 김창흡은 그 당혹감과 슬픔을 솔직하게 토로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얼굴이 망가져서 만남을 꺼리게 되니 차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발음이 부정확하니 침묵을 지킬 수 있으며, 기름진 음식을 잘 씹지 못하니 식생활이 담백해지고, 글 읽는 소리가 유창하지 못하니 마음으로 깊이 볼 수 있게 된다.” 이가 빠져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신체 기능이 옛날 같지 않은 노인을 배려하고 그분들이 감내해온 과거의 수고를 치하해야 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늙음이 안하무인의 방종을 누리는 특권이 될 수 없음 역시 마땅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노인에게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말했다.
신체의 기능이 저하된다고 해서 욕망이 반드시 줄어드는 것도 아닐뿐더러, 욕망이 줄어든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과 깨달음의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 왜곡된 욕망과 편협한 정보 속에 갇힌 늙음은, 자기 성찰 없는 분노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박지원은 쇠락해가는 자신의 신체를 보며 이제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실감하고, 세상에 영원히 내 소유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늙어감은 그로 인해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노년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이런 순간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2017.2.22.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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