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story

날 기다릴 수 있겠니?

송담(松潭) 2018. 3. 3. 14:55

 

날 기다릴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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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과 사랑, 인간 사회의 가장 오래된 주제이자 동서양의 고전 작품에 가장 자주 차용되는 소재이다. 절박하고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상황일수록 청춘남녀는 더 열렬히 사랑을 갈구한다. 체면이나 조건 따위 진부한 것들의 무의미함을 잘 알기에, 알량한 자존심 따위를 내세워 인생을 낭비할 시간이 없음을 동물적 감각으로 간파했기에.

 

 유신과 긴조 시절의 대학가도 마찬가지였다. 흉흉한 소문과 숨막힐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사랑은 꽃피고 커플들은 탄생했다. 엄주웅과 나도 전쟁터에서 로맨스를 꽃피운 경우였다.

 

 ", 장학금 탔는데 밥 사줄까?"

 놀라운 제안이었다. 자기 돈으로 밥을 사기는커녕 시골 출신인 내게 라면 한 그릇 사 달라, 버스표 꿔 달라, 빈대 붙기 일쑤였던 그에게서는 상상하기 힘든 말이었다. 허구한 날 재봉틀로 엉덩이 부분을 기운 바지를 입고 다니고, 윗도리는 검정물 들인 군복을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그였다.

 

 무슨 장학금? 물었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고 그냥 씩 웃기만 했다. 순간, 그의 미소가 돌멩이 하나를 툭 던진 듯 내 마음에 동그란 파문을 일으켰다 명숙아, 정신 차려, 이 남학생은 바이올린 켜는 긴 머리 소녀를 죽자사자 쫓아다니는 철없는 남자.

 

 나는 우리 엄마의 말에 따르자면, 독신으로서 세상에 족적을 남겨야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팔자 센' 여자 아닌가. 남자 따위를 사귀는 일에 내 소중한 시간을 바쳐서는 안 된다고 맘속으로 도리질을 쳤다.

 

 “제주도 출신인데 바다 보고 싶지 않아? 우리, 기차 타고 동해 가서 바다나 보고 오지 않을래? 나 오늘 돈 무지 많은데..”

 

 바다! 회색빛 빌딩숲과 군중, 자동차들 사이에서 늘 서귀포 푸른바다를 그리워 하던 내 게는 참으로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우리는 곧장 청량리역으로 달려가서 경춘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춘천에 무작정 내려 그곳 번화가인 명동 골목에서 난생 처음으로 닭갈비를 먹었다. 둥그런 번철에 빨갛게 양념한 닭갈비와 얇게썬 고구마, 양배추를 잔뜩 넣고서 지글지글 볶은 다음 좁쌀밥 위에 척 얹어서 먹는 맛이란! 닭갈비는 그날 이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가 되었다.

 

 밤이 되었고, 돌아갈 열차는 끊겼다. 우리는 함께 여관에 묵었고, 밤이 깊어가도록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릴적 이야기, 앞날에 대한 고민과 갈등, 부모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리라는 자괴감 등등.

 

 못 마시는 주제에 무리해서 마신 소주 몇 잔 탓일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좁은 여관방에서 그와 나는 양쪽 끄트머리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는 나보다 먼저 꿈나라로 간 듯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 친구는 정말이지 믿을 만한 남자구나평소에도 괜찮은 동료로 여겼지만 더욱 믿음이 갔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서늘한 바람이 한줄기 지나갔다.

손목조차 안 잡는 걸 보면 이 친구에게 나는 정말 여자가 아닌가 보다.’

 

 1023일 저녁, 수유리 자취방에 예고 없이 방문객이 들이닥쳤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엄주웅이었다. 한 번도 우리 집에 와본 적이 업t는 그는 소주만 갖고 나를 찾아 왔다.

 

 “나 아주 먼 데 가는데아주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 기다려줄 수 있을까?"

 

 쿵,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내놓고 말한 적은 없었고, 심지어 영초언니가 대놓고 물었을 때까지도 딴전을 피웠지만 9.14시위 이후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딘가를 향해서 비장하게 걸어가는 자의 뒷모습, 주위 사람들과의 인연을 모질게 끊어내려는 안간힘 같은 게 느껴졌다. 지난 주에 야학을 떠나겠다고 선언할 때도 그랬다.

 

"언제 할 건데?"

 

 그가 무너지듯 내 가슴에 안겨 왔다. 그리고 쥐어짜듯 내뱉었다.

 

명숙아, 사랑한다...사랑 한다!”

 

 그가 꺼억꺼억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정과 사랑사이의 경계선에서 늘 어정쩡하게 서성대던 우리는 그날 화계사 솔숲에서 마음의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었다. 연인이 됨과 동시에 헤어져야 하는 운명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전쟁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절망감과 절박감이 연인들을 솔직하게 만들고 격렬한 사랑에 빠뜨리듯이, 그때 우리도 그러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엄주웅이 사랑한 대상은 서명숙이라는 특정한 여학생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 암울한 시대에 불의한 국가권력과 감히 맞장을 뜨려는 자가 끊어내야 하는, 포기해야 하는, 남겨두고 떠나야만 하는, 그 모든 그리운 것들의 한 조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명숙 / ‘영초 언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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