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달에선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경상북도 영주시. 볼 빨간 사춘기의 고향이자 부석사로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전주 한옥마을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고풍스러운 무섬마을, 이 마을 앞의 외나무 다리 등이 참 좋다. 시내에서 한참 벗어나 소백산 자락 입구에 무쇠달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초겨울 시골 마을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옷을 벗은 나무들이 즐비했고 많지 않은 주택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간이역인 희방사역이 있다. 곧 폐역을 앞두고 있지만 일제시대에는 제법 번성했던 역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 자체가 역이 생기고 돈이 모여들면서 생긴, 철교에서 따왔으니 평범한 농촌이 번성하기 시작한 시점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은 근대화의 흔적을 나이테처럼 두르고 있었다. 일제시대 역무원들이 묵었던 건물이 폐가로 남아 존재한다.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아치형의 큰 터널도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건축물을 가까이서 보는 게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다. 사진을 찍으니 그대로 그림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상징인 슬레이트 지붕도 곳곳에서 보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농촌진흥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여러 시설들까지, 20세기의 풍경이 이곳저곳에 쌓였다. 새로운 흐름이 생기면 지난 시간의 잔재들을 싹 밀어버리는 대도시의 생태와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 낯설었다. 내용에 대한 고민 없이 토건 사업으로 정책의 흔적을 남겨온 지난 시간의 증거 같기도 했다.
시골 마을을 방문하기 좋은 때는 역시 초목에 색이 도는 봄부터 가을이다. 그럼에도 겨울의 초입에 이 마을을 찾은 건 캐러밴에서 숙박하기 위해서다. 난방도 잘되고 화장실도 깨끗하다. 수압도 좋다. 무엇보다 철로변에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가끔 지나다니는 기차 소리는 비록 ‘칙칙폭폭’ 소리를 내지 않아도 운치가 있으니까. 숙소에 짐을 풀고 부석사에 올랐다. 108계단을 오르려니 절로 번뇌가 찾아왔다.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약수 한 바가지를 마셨다. 어느 새 내린 석양이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때마침 약하게 깔린 안개에 수묵화가 따로 없었다.
저녁 식사를 한 후 영주의 명물이라는 랜드로바 떡볶이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여길 누가 올까 싶었는데 텐트를 치고 고기를 굽는 여행객들이 보였다. 바비큐, 하면 으레 떠들썩한 풍경을 연상하지만 마을을 닮아 조용했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숯불을 바라보는 그들에게선 고기 구워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우리 차로 들어가 떡볶이와 어묵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차창 밖으로 간혹 기차가 지나갔다. 덜컹덜컹, 무심하게 어디론가 향하는 완행열차와 함께 밤도 깊어갔다.
여행을 갈 때는 명승지나 빼어난 풍광이 있는 곳으로 간다. 사진을 찍고 맛집을 찾는다. 호텔이나 모텔 등에서 잠을 청한다. 일상화된 여행의 풍경이다. 빼곡한 계획으로 시간이 채워진다. 나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좀 더 게으를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제법 배치한다. 아니,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보다 최적이었다. 일반적인 도시나 관광지였다면 식사시간 외에 카페에서 차라도 한잔하고 그랬을 것이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무쇠달마을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앞서 썼던 문장들 외에 그리 덧붙일 게 없다. 다만 민박이나 여관 대신 캐러밴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느 여행과는 달랐던 이유다. 볼 것도, 할 것도 딱히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일상의 틈에서 빠져나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내면의 소리와 감정이 만드는 파동을 섬세하게 관찰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아를 찾기 위해 굳이 갠지스강까지 간다지만, 거기 자아 자판기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조용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루 편히 묵을 수 있는 시설이 있는 곳에, 침묵과 어둠만이 존재하는 주변 환경이 있다는 건 오히려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무것도 없기에,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를 쾌적한 결핍이라 이름 지었다.
김작가 / 대중음악 평론가
(2018.1.4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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