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능력, 대화의 능력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사랑에 대해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몇 가지 태도에 의문을 제기했는데, 특히 다음 두 가지 주장이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상대방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까에 집중한다. 또한 사랑하는 것을 이러한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로 가정한다, 즉 사랑에 실패했을 때, 마땅한 상대가 아니었다거나 꼭 맞는 사람이 아니였다고 말할 뿐 자신의 사랑하는 능력이 부족해서라고는 설명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란, 사랑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에 관한 것이고 그것은 대상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사람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 과연 기술인가, 기술을 익힌다고 해서 그것이 사람의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줄 것인가?'와 같은 의문을 끊임없이 표한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의 말에도 똑같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화를 상대방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이해받기 위한 문제로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의 이야기에 얼마나 귀 기울이는 사람인지, 상대방의 진가를 발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줄 수 있어?'에 집중한다. 상대방이 그때 어떤 말을 했고, 그 말이 내 기분을 어떻게 상하게 했는지에만 집중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대화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로 간주한다. 상대가 유난히 까다로운 사람이고 사이코적 기질이 다분해서 말이 안 통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대화는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내가 넉넉한 말 그릇을 지녔다면 대화하기에 어려운 상대방을 만나도 대화를 지속할 수 있다. 대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실제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
대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조금 더 높은 차원에서 관계를 바라본다.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잘못을 따지는 입씨름에서 벗어나, 말속에 숨어 있는 메시지를 따라 다른 통로를 발견한다. 말에 매몰되지 않고 더 높은 관점에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대상을 탓하지 않는다. 버거운 상대를 만나더라도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따뜻한 배려를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해받으려 하기 전에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써 말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인성과 성격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되는가를 돌아보는 것. 말의 수준이 높다는 것은 아마도 이 두 가지 법칙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 2 >
씨름의 방식, 왈츠의 방식
요즘 사람들의 관계 맺는 방식을 보면, 어릴 적 아버지께서 즐겨보시던 ‘씨름’이 떠오른다. 씨름에서 두 사람은 동지가 아니라 적이다. 서로의 힘과 기술을 겨루어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그 관계에서는 한 명이 이기면 나머지 한명은 반드시 지게 되어 있다. 반면 왈츠는 다르다. 왈츠는 동행이다. 버티지 않고 함께 간다. 파트너가 앞으로 몇 걸음 나오면 상대방은 그만큼 물러서서 균형을 맞춘다.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보조를 맞추고, 한 명이 화려한 동작을 구사할 때 나머지 한 명은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름다운 선율에 맞추어 하나의 스토리를 완성해나간다.
사람들 중에도 ‘씨름의 관계’를 맺는 이가 있고 ‘왈츠의 관계’를 맺는 이가 있다. ‘누가 이기나 보자'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있고, 경쟁보다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는 사람이 있다. 씨름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은 말을 무기로 휘두른다. 그것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고 한다. 반대로 왈츠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말은 방향을 가리키는 도구다. 사람들과 목적지를 향해 함께 걸어갈 때 필요한 도구.
당신은 지금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 회의시간에, 점심시간에,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할 때 당신은 생존을 위한 말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협력을 위한 말을 선택하는가. 당신이 던진 말에 상대방은 불안해하는가. 아니면 안도하는가.
말 그릇을 다듬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것과 같다. 살면서 반드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거나, 완벽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거나, 대단한 업적을 쌓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말 그릇을 매만지고 보듬는 일만큼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움직임을 의식하고, 살피고, 책임을 지는 일이 곧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기 환자들을 돌보며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작가 브로니 웨어 (Bronnie ware)는, 그의 책<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에 이런 말을 남겼다.
“수년간 내게 상처를 주었던 말들도 그 말을 내뱉은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말들은 그들의 상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도 몇 십 년 전에는 아름답고 순수한 존재였다. (중략) 특정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지 않고 심지어 미워하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내게 상처를 준 그들의 행동과 말이었다. (중략)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여전히 본래의 순수함이 남아 있다. 단지 삶의 고통을 겪으면서 흐려져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당신이 아직 기억하고 있는 아픈 말도 당신을 겨냥한 채 작정하고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설령 당신의 눈에 그렇게 보였더라도 말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처 많고 두려움 많은 존재들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또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준비되지 않은 말을 서둘러 꺼내는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투르고 또 한참 서투르다.
우리 모두는 말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분명 내 것인데도, 잘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과 생각과 습관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여 수없이 많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말 그릇을 인식한 사람, 멈추고 돌아보는 사람,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그 후회의 시간을 조금씩 줄여나갈 수 있다. 조금씩 자신의 말 그릇 안에 마음과 사람을 담아낼 수 있다.
당신이 하는 말이 누군가를 일으키고, 다시 달리게 할 수 있기를, 누군가를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무엇보다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길 응원한다.
김윤나 / ‘말그릇’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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