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구운몽

송담(松潭) 2018. 1. 30. 13:05

 

구운몽 / 김만중

 

 

 

 

 

 

 

 여름의 열기가 잦아들고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문득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다 겨울이 오고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일제히 시간철학자가 된다. 시간에 대한 사유와 담론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시간은 늘 가고 온다. 헌데 왜 늘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시간들은 남다르게 다가올까? 일 년이라는 마디가 주는 감회 때문이리라. 시간은 무심하게 흐를 뿐인데, 인간은 그 흐름에 리듬을 부여하고 또 이름을 붙인다. 12개월, 24절기, 72절후 등 이런 단위들이 모여 일 년이라는 시간이 탄생 한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인생과 역사를 헤아리는 좌표로 삼는다. 해서, 평소엔 별 생각이 없다가도 해가 바뀔 때쯤이면 문득 장탄식이 쏟아진다. "아니 벌써?!' 혹은 '아 세월의 덧없음이여!'와 같은.

 

 허나, 이런 탄식들에는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만약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팍팍한(혹은 지겨운) 세월 안에 꼼짝없이 갇혀 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의 무상함은 아쉬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처가 아닐까.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뭔가 더 얻고 누릴 것이 있는데 마치 세월이 그걸 앗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물론 이율배반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누릴 수 없으므로. 그럼에도 이런 식의 이율배반을 포기하지 않는 건 욕망을 지속하고 극대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삶의 서사에서 일탈한 욕망, 그것은 쾌락의 법칙에 종속되어 버린다. 우리는 지난 십여 년 동안 그것을 일러 이요 희망이라 불러 왔다. 그리고 이 꿈의 질주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다다익선! 그렇다면 대체 얼마큼의 부가 있어야 만족하게 될까? 그 부로 대체 무엇을 누리고 싶은 것일까? 또 그렇게 한바탕 즐기고 나면 과연 세월의 덧없음에서 자유로워질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구운몽을 다시 읽게 된 건 이런 맥락에서다.

 

구운몽은 숙종 때의 문호 서포 김만중이 쓴 고전소설로 낭만주의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한 명의 사내와 여덟 명의 여인이 펼치는 일장춘몽을 다루고 있다. 형산 연화봉에서 설법을 하던 육관대사 밑에 성진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외모도 비범하고 총명과 지혜가 뛰어난 소위 '엄친아'였다.

 

 춘삼월 호시절에 대사의 심부름으로 용궁엘 갔다. 용왕이 주는 술 석 잔을 마시고 발그레한 얼굴로 돌아오다 외나무다리에서 팔선녀와 마주친다. 요즘으로 치면 최고의 '걸그룹을 만난 셈이다. 한 명도 아닌 무려 8명의 미인을 만났으니 어떤 사내인들 마음이 동하지 않으리오. 게다가 팔선녀 역시 춘흥에 겨워 대담하게 성진을 희롱한다. 성진이 희롱에 장단을 맞추느라 복숭아나무 꽃가지를 하나 꺾어 선녀들 앞으로 던지자 가지에 달린 꽃송이들이 갑자기 맑은 구슬 여덟 개로 변하였다." 그러자 팔선녀 들이 저마다 한 개씩 받아 가지고 눈웃음을 짓더니 문득 몸을 솟구쳐 구름을 타고 하늘 높이 훨훨 날아갔다성진이 돌아와 빈방에 홀로 앉아있노라니 선녀들의 옥같이 맑은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고 꽃 같은 얼굴들이 수줍은 눈길로 추파를 던지는 듯 마음이 황홀하여 진정하지 못했다. 황홀경은 번뇌와 망상의 원천이다. 하여. 한번 마음이 동요하는 순간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다. 그 즉시 지상으로 떨어져 양소유로 태어났다. 팔선녀도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이어지는 여덟 개의 로맨스! 이게 소설의 기본 줄거리다.

 

 아마 남성들은 생각만 해도 가슴들이 뛰시리라. 가는 곳마다 자신을 기다리는 여인들이 있고, 그녀들은 한결같이 양소유에게만 몸과 마음을 허한다. 그녀 들은 눈부신 외모에 가무와 시, 거문고와 검 등 온갖 재능의 화신들이다. 양소유의 카리스마야 말할 나위도 없다. 과거급제는 떼어 놓은 당상에 문무겸비로 반란의 무리들을 간단히 제압하고 오랑캐와의 전쟁도 거뜬히 해결해낸다. ‘도대체 못 하는게 뭐야?’라고 묻고 싶어진다. 승상의 지위에 오른 것은 물론, 두 명의 공주를 아내로 여섯 명의 낭자를 첩으로 삼는 쾌거(?)를 이룬다. 일부다처제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차지한 셈이다.

 

 이거야말로 낭만적 판타지의 극치다 그렇다. 애시당초 이 작품의 콘셉트는 현실이 아니라 꿈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부귀영화에 대한 꿈! , 원하는 건 무엇이든 얻었다. 26첩에 문무겸전에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이젠 누리기만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리는 부귀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엄청난 대저택에 화려한 파티 대규모의 풍류와 사냥, 한마디로 오감의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매양 물가에 찾아가 낮에는 낚시질이요, 밤에는 물에 비낀 달빛을 감상하였다. 또 골짜기에 들어가서는 매화를 찾고, 돌벼랑 앞을 지날 때면 글을 지어 쓰며, 솔 그늘에 앉으면 거문고를 안고" 탔다. 처음 술로 맺어진 인연이라 그런지 이후에도 함께 누릴 수 있는 복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긴 우리 시대의 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값비싼 술과 기름진 음식,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들, 그들과 함께 즐기는 각종 이벤트!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주색잡기다.(주색잡기를 좀 고상하게 하면 그걸 일러 교양 혹은 문화라고 부른다) 요컨대, 주색잡기를 맘껏 누릴 수 있는 것. 이것이 꿈을 이룬 뒤에, 곧 성공의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체적 일상이다.

 

 부귀를 이루기 위해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희생한다. 청춘도 휴식도 우정도 지성도, 그런데 그 부귀의 절정에는 무엇이 있는가? 주색잡기와 인생무상! 더 디테일하게 말하면, 오감을 극대화하기, 그다음에 오는 깊은 상실감! , 이런 허무할 데가! 그럼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 쾌락이라도 실컷 누리고 싶다고 지난 10년 동안 버블경제가 사람들의 영혼에 심어준 한바탕 꿈이다.

 

 그럼 다시 묻자 대체 얼마큼 누려야 이젠 충분해, 라고 할 것인가? 과연 그런 단계가 있기나 할까? 쾌락이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 누리면 누릴수록 더 목마르게 되는 법인데어떤 쾌락주의자도 양소유보다 더 많이 누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양소유도 결국 세월 앞에선 무너져 버렸다.

 

 그런데 잠깐! 이 명제에는 아주 치명적인 모순이 담겨 있다. 인생과 쾌락을 등가화해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모두가 부귀와 쾌락을 향해 달려가다 보니 삶의 가치와 목표가오직 그것뿐이라는 전도망상이 일어난다. 그러고는 이렇게 외쳐 댄다. 인생은 허무하다고, 세상은 참으로 덧없다고 하지만 덧없는 건 인생 자체가 아니라 부귀공명과 쾌락에의 꿈이 아닐까?

 

 사실 현대인들은 양소유보다 더 큰 부귀영화를 누린다. 문명의 고도화로 일상의 모든 것을 기계가 다 해결해줄뿐더러 스마트폰 안에 들어가면 화려한 스펙터클, 감미로운 음악, 박진감 넘치는 게임, 섹시한 가무 등 양소유가 부귀의 절정에서 누렸던 것들이 다 있다. 그런데 왜 만족감이 없는가?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에서 그것을 이루고 싶어서? 그렇다면 그게 실제로 가능한 부유층들은 다 구원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가 않다. 양소유가 그랬듯이 엄청난 부귀와 쾌락을 누리는 이들 역시 존재의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허무함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곧 부귀와 쾌락의 숙명이다.

 

 고미숙 / ‘고전과 인생 봄여름가을겨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