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글쓰기가 두려워요

송담(松潭) 2017. 11. 30. 18:24

글쓰기가 두려워요

 

 

 모든 창작은 타인에게 평가받을 수 있다는 공포스러운 가능성을 전제로 이루어집니다. 특히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글쓰기는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남들에게 내보이고 나면 누군가 네 세계관은 엉터리야라고 지적하거나 네가 알고 있던 정보는 틀렸어하며 오류를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바보스러운 순간 혹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순간을 글속에서 고백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웃음거리가 될까 봐 두려워지고, 동시에 그 두려움 때문에 그럴싸한 모습만 편집해 보여주는 쓰나 마나 한 글을 쓸까봐 더 걱정하기도 합니다. 두려움의 장벽 앞에서 여린 창작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면 어떤 태도와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초조한 마음에 첫 문장조차 시작하지 못할때, 내면의 비평가가 등장해 이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을 쓰겠냐고 채찍질할 때, 글을 쓰겠다는 의욕조차 사라지려고 하는 위험한 순간에 저는 피터 레이놀즈의 을 펼쳐봅니다.

 

 주인공 베티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교실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미술 시간은 이미 끝난 뒤지만 베티의 책상 위 도화지는 하얀 상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미술 선생님이 하얀 도화지를 보면서 ! 눈보라 속에 있는 북극곰을 그렸네라고 좋게 해석해주지만 베티는 이렇게 받아칩니다.

 

 “놀리지 마세요! 전 아무것도 못 그리겠어요!"

 

 미술 선생님은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한번 시작해보렴.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하면서 재차 독려합니다. 베티는 연필을 잡고 도회지에 힘껏 내리꽂습니다. 도화지 중간에 까맣고 동그랗게 연필 자국이 파이고, 베티는 도화지를 선생님에게 줘버립니다. 선생님은 도화지를 들고 한참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합니다.

 

 “! 이제 네 이름을 쓰렴.”

 

 도화지 오른쪽 아래 베티는 자신의 이름을 적어 돌려줍니다. 그런데 다음 미술 시간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선생님이 베티가 점을 찍은 도화지를 아주 멋진 황금빛 액자에 넣어 교실에 전시했기 때문입니다. 액자 앞에서 베티는 팔짱을 끼고 말합니다.

 

 “! 저것보다 훨씬 멋진 점을 그릴 수 있어!"

 

 그날부터 베티는 수채화 물감을 꺼내서 노란 점 초록 점 빨간 점, 파란 점을 그리고 또 그립니다. 파란색과 빨간색을 섞어서 보라색 점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어느 날에는 작은 점을 그릴 수 있으니까 아주 커다란 점도 그릴 수 있을 거라며 커다란 도화지를 꺼내 들기도 합니다. 마치 추상화를 그리는 현대미술가처럼 커다란 캔버스에 비어 있는 점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베티의 점 그림들은 차곡차곡 쌓여갔고 학교에서 전시회를 열기에 이릅니다. 전시화 인기는 아주 대단했습니다.

 

 전시장을 찾은 한 꼬마가 베티를 향해 말합니다.

 “누난 정말 굉장해 나도 누나처럼 잘 그렸으면 좋겠어.”

 “너도 할 수 있어.”

 “내가? 아니야, 난 정말 못 그려, 자를 대고도 선을 똑바로 못 그리는걸.”

 

 그 꼬마는 똑바로 선을 긋고 싶었으나 결국 삐뚤삐뚤하게 그린 도화지를 베타에게 건네줍니다. 이 선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베티가 말합니다.

 

 "! 이제 여기 네 이름을 쓰렴 "

 

 저는 에서 이 문장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일렁입니다. 앞으로 어떤 태도로 글을 써나갈지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그만큼 함축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문장이거든요. 이름을 쓴다는 건 이게 나에요라고 선언하는 일입니다. 있는 그대로, 한계가 있는 채로 자신을 인정하는 일이죠,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입니다. 베티가 처음에 그린 점은 무능, 한계, 부족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못한 베티가 겨우 해낼 수 있는 거라곤 점을 찍는 것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도화지에 이름을 쓰고 액자에 걸어 전시한 순간 점은 베티의 독특한 개성으로 변모합니다.

 

 책의 중반부에 베티는 반복해서 점을 그립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점으로 할 수 있는 표현들을 익혀나갑니다. 다른 친구가 그린 그림들이 좋아 보인다고 흉내 내거나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베티 자신이 할 수 있는 점 그리기에 몰두한 이 장면이 저는 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혜진 /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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