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치유

저는 늘 혼자입니다

송담(松潭) 2017. 12. 4. 13:04

 

저는 늘 혼자입니다

 

 

 to. 에디터C

 

 집에서 나와서 혼자 산 지 이제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제 또래 여자가 겪을 수 있는 최고와 최악의 상황을 모두 겪어봤다고 생각해요. 의도하지 않았고 막을 수도 없었던 사건들 때문에 일자리를 몇 번이나 잃었고, 큰돈을 사기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건 그런 순간에 늘 혼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힘들면 좋은 친구들이 곁에 있어주긴 했지만 결국 제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건 제 자신이었어요. 벌어진 사건들을 수습하며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지금은 친구 하나 없는 타지에서 외롭고 막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숨 쉴 때마다 언제쯤 이 괴로운 삶이 끝날까 생각하곤 합니다. 이런 갑갑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도 없어요.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원래 인생이 그런 거야", "나도 힘들다. 그런 말 하지 마"라고 말하니까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스치듯 만나는 얕은 관계의 사람들에게조차 요즘 지쳐 보인다, 힘들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저도 제 자신을 보듬어줄 수가 없어요. 출근하기 싫어서 매일 울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제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빠집니다. 이런 삶이라면 대체 왜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사람들 마음에는 왜 이렇게 상처가 많은 걸까. 사는 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각자 상처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또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식으로 이어지는 게 삶인 걸까. 안간힘을 써봤자 결국 인간은 외로운 존재인 걸까 같은 묵직한 질문이 도돌이표에 걸린 것처럼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사노 요코가 지은 태어난 아이를 처음 읽던 날, 비로소 도돌이표에서 놓여날 수 있었죠. 책은 첫 문장부터 의미심장했습니다.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날마다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우주 한가운데에서 별 사이를 걸어 다녔습니다.

 별에 부딪혀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태양 가까이 다가가도 뜨겁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사자가 위협해도 무섭지 않았고, 모기가 물어도 가렵지 않았고, 강아지가 날름날름 핥아도 간지럽지 않았습니다. 빵가게에서 구수한 냄새를 맡아도 먹고 싶지 않았고, 여자아이가 "안녕?" 하고 말을 걸어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니 이 모든 게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어느 상황에서도 상처받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그 무엇도 욕망하지 않습니다. 태어나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세계와 거리를 둡니다. 모두를 상관없는 영역으로 밀어냅니다.

 

 그랬던 아이가 어떤 계기로 변화하게 됩니다. 여자아이가 개에 물려 상처를 입고 엉엉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는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엄마가 여자아이를 깨끗이 씻기고 약을 바른 다음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모습을 보면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처음으로 뭔가 원하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아이가 원한 건 바로 반창고였습니다. 반창고가 붙이고 싶어서 반창고, 반창고!" 하고 외쳤는데, 그게 엄마!” 하는 외침으로 바뀌어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마침내 태어나게 됩니다.

 

 탄생의 계기가 반창고라니, 어딘지 뭉클한 은유입니다. 이 세계에 우리가 태어난 목적은 서로의 상처를 닦아주고 적절한 조치를 취한 후 덮어주는 행위를 하기 위함이 아닐까, 오래전 어느 날 응애!"울며 태어났던 그때는 우리 모두 서로에게 반창고를 붙여주려는 따스함과 선의를 품고 있었는데 기성 사회의 말을 배우고 질서를 익히며 그 본능을 잠시 잃어버린 건 아닐까 상상하게 만든 은유였죠.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이제 구수한 빵 냄새를 맡으면 배가 고팠고, 모기에게 물리면 가려웠고, 강아지가 핥으면 간지럼을 탔고, 이리저리 걷다 부딪혀 다치면 아팠습니다. 바람이 불면 깔깔깔 웃기도 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는 불사조 같았던 존재가 이제는 쉽게 상처받고 흔들리며 자주 뭔가를 욕망해서 필연적으로 실망하는 취약한 존재로 바뀐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 아이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오르며 말합니다.

 

 "이제 잘래.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야.”

 

 작가 사노 요코가 인생이 원래 힘든 거니 그러려니 하고 살아라라고 말하려고 태어난 아이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자주 상처받고, 흔들리고, 자책하고, 욕망하고, 실망하는 이유는 상관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나는 상관없어라는 울타리 바깥으로 세계를 밀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은 그런 관여들로 이어집니다. 기어이 상관하게 되는 밀어내지 못하는 어리석은 애정으로.

 

 그녀에게 큰 명성을 가져다준 대표작 100만 번 산 고양이100만 번이나 환생한 얼룩 고양이 이야기다. 100만 명의 사람이 얼룩 고양이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지만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매사에 심드렁했던 얼룩 고양이는 어느 날 하얀 고양이를 만난다. 처음으로 자기 자신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된 얼룩 고양이의 삶에 기쁨이 찾아든다. 하얀 고양이가 죽던 날, 얼룩 고양이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환생하길 멈춘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유한하기 때문이며, 불구하고 또 다른 유한한 존재를 사랑할 때 삶의 의미가 완성된다는 메시지가 커다란 울림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와 그림책이 특별한 이유는 그 안에 삶에 대한 환상이나 신화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행복에 대한 강박이 없다. 인생에 근심이나 걱정은 없어야 한다고 믿어버리는 순간부터 사는 게 골치 아파지는 법이니까. 사노 요코 할머니라면 굴뚝처럼 매캐한 목소리로 등짝을 짝 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산다는 게 원래 × 같은 거야. 왜 너라고 매번 행복해야 해?”

 그러면 아마도 나는 그 품에 안겨 안도하겠지.

 

 최혜진 /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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