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없어요
일러스트·박용인 (이미지 출처 : 신동아 2013.9월호)
얼마 전 친구와 만나 일과 자아실현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하루에 4시간 반 일하고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하기 싫은 일도 할 수 있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일하며 보내는 사회에 태어난 이상 돈 벌기 위해서라는 한 가지 이유로 일을 선택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큰 환경에 살고 있으니 가급적 자기 본성에 맞는 일을 해야 삶의 행복도가 높아지지 않겠냐고 하면서,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처럼 본성에 맞는 일을 찾은 사람은 정말 운이 좋은 게 아닐까. 자기 일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직종에 따라 많이 다를 거야. 공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거나 남들이 꺼리는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돈벌이 말고 다른 의미를 찾기 힘들지 않을까."
친구의 말을 듣고 평소에 꽤 자주 들었던 어떤 문장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회사 동료들과의 티타임, 동기들의 술 모임, 장을 보러 찾은 시장,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르신들의 식사 자리 등 어디에서나 불쑥 들려오던 문장.
“먹고살려면 참아야지."
경제 규모 세계 11 위에 1인당 GDP가 3만 달러에 육박하는데도 여전히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살았던 산업화 시대를 살기라도 하듯 우리는 서로에게 ‘먹고사니즘’을 가르칩니다. 꿈, 성취감, 성장, 돌봄, 윤리 의식, 공동체 의식 등 행복을 구성하는 의미 있는 가치들은 먹고사니즘 앞에만 가면 그 빛을 잃고 하찮아집니다. 먹고사니즘은 상상하고 도모하는 입을 닥치게 만들고 사유의 시동을 꺼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사안을 먹고사니즘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삶을 그저 잔혹한 서바이벌 게임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먹고살 걱정이 해결돼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익을 늘릴 수 있다면 다른 건 무시해도 좋다는 목소리가 속삭이는 듯합니다. 구의역 사고와 세월호 사건을 만들어낸 잔혹한 시스템의 목소리 말입니다. 저는 단순 노동자는 분명 돈 때문에 일할 것이고 다른 의미는 느끼지 못할 것이란 판단도 바로 이 먹고사니즘이 만들어낸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 사회 구성원으로 기능한다는 존재감, 가족 부양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사명감, 반복 노동과 그로 인해 예측할 수 있는 일상 안에서 느껴지는 심리적 편안함 등 다양한 감정을 없는 셈 치고 다 돈 때문이라고 우악스럽게 요약해버리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꿈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꿈 이 뭐예요?" 이런 질문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과 환경을 생의 전반에 걸쳐 차곡차곡 유·무형의 가치로 바꿔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너무 단순하게 뭉뚱그리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누군가 제게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마음속에 있는 그 구구절절한 것들을 어떻게 정리해서 말하나 싶어서 버벅댈 것 같아요.
근래에 꿈이라는 말은 홈쇼핑 채널의 매진 임박 알림처럼 불안을 조장해서 뭔가를 파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꿈이 있으면 다 할 수 있다고, 꿈부터 꿔보라고 하는 말이 역으로 선동이나 강압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았기에 누군가 “꿈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말하는 걸 들을 때마다 심경이 복잡해집니다. 사고를 당하지 않고,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고, 안정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일 자체가 이미 곡예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워진 미친 자본주의 시대에 스티브 잡스 같은사람을 들먹이면서 꿈까지 찾으라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꿈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일의 의미, 목적, 세상을 마주하는 자세와 태도 등에 대한 질문과 생각을 놓아버리는 건 더욱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꿈이라는 단어를 조금 바꿔보려고 합니다. ‘내 본성이 가치 있다고 의미 부여할 수 있는 행위’ 정도로 풀어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표현을 바꿔보면 생각을 예민하게 다듬기 좋습니다. 그 행위가 뭔지 찾으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거든요. 자신의 본성을 모르면 어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일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도 알기 힘듭니다. 따라서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꿈이 없어 고민이라는 말을 세분화해 설명하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냐는 뜻입니다. 이는 자기 느낌을 포착하는 레이더망이 무뎌졌다는 신호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즐거운지, 재미를 느끼는지, 집중이 잘 되는지, 싫은지, 도망가고 싶은지 등 자신 안에서 피어나는 느낌을 포착하면 자연스럽게 ‘아, 나는 이 일이 하고 싶었구나’, 또는 ‘하기 싫었구나' 하고 알 수 있거든요. 물론 직접 해보기 전에는 그 일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면 정반대의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오해를 꽤 많이 하며 살아가니까요.
단 하나의 정답 찾기에 몰두하는 한국식 정규 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 대부분은 정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감정, 느낌, 취향, 욕망, 나아가 '나'라는 단어 앞에서 막막함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취업 준비 기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학 졸업 후 갖는 시간은 우리가 처음으로 정규교육 과정에서 빠져나와 홀로 맞게 되는 순간입니다.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 서는 순간이죠. 그것도 아주 절실하고 격렬하게요. 그러므로 생각하기에 따라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험해보는 시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짜준 수업 시간표대로 살아오다가 처음으로 자기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시간을 얻은 셈이죠.
‘나는 지금 어느 회사든 들어가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면 무릎의 힘이 탁 풀리고 서글퍼지지만 ‘나는 지금 자기 탐험중이야. 막막하고 서툰 게 너무 당연해, 내게 시간을 주면 나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면 힘들어도 무릎을 꿇게 되진 않습니다. 당락에 대한 의미 부여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취업 준비 기간을 그저 입사를 위한 기계적인 나날들로 바라본다면 회사에 지원했다가 탈락하는 게 쓰디쓴 패배처럼 느껴지지만 자기 탐험의 일환으로 본다면 탈락한 경험에서도 자기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심리적 타격은 입겠지만 마음을 닫고 가시 돋친 말을 쏟아낼 만큼 심각한 좌절에 빠지진 않을 겁니다.
최혜진/ ‘그림책에서 마음을 묻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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