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를 짚는 손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랑을 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주고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아무리 다가서도 얇은 빈틈이 생깁니다. 전위적인 화가 마르셀 뒤샹은 그것을 '앵프라맹스(infrarmince)'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 자신이 꾸며낸 말이지요.
프랑스말의 ‘앵프라(infra)’는 영어의 ‘인프라스터럭처(infrastructure)’라고 할 때의 인프라(infra)와 같은 말로 기반(基盤)이나 하부(下部)를 뜻하는 접두어입니다. 그리고 맹스(mince)는 ‘얇은 것, 마른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외선을 ’앵프라루즈(infrarouge)'라고 하듯이 앵프라맹스라고 하면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초박형(超薄形)의 상태를 뜻하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뒤샹 자신은 그 말을 실사(實辭)가 아니라 형용사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구체적인 상태라고 하기보다는 작용이나 효과를 나타내는 말로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섬세한 어떤 작용을 뜻하는 암호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비로드 천이 서로 스칠 때 나는 미묘한 소리 같은 것을 그는 앵프라맹스라고 불렀습니다. 시인 김광균의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와 같은 것이 한국적인 앵프라맹스 정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뒤샹은 그의 노트에서 앵프라맹스를 설명하지 않고 64가지의 시적 이미지를 통해서 그 개념을 암시하려고 했습니다. 그중 알기 쉬운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비로드 바지-(걷고 있을 때) 바짓가랑이가 스치면서 나는 휘파람 같은 소리는 소리에 의해 표현되는 앵프라맹스의 분리이다. (청각적)
- 담배 연기가 그것을 내뿜은 입과 똑같은 냄새를 지닐 때 두 냄새는 앵프라맹스에 의해서 맺어진다. (후각적)
- (사람이 막 일어선) 의자에 앉을 때의 미지근한 체온이 깔려 있는 것은 앵프라맹스이다.
- 앵프라맹스의 애무. (촉각적)
사람들은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합니다. 나는 타자와 늘 하나가 되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고 끌어안습니다. 그럴수록 어쩔 수 없이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틈새를 발견하고 안타까워하지요 애타는 절망이 또다시 남에게 다가서려는 욕망을 일으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도 부르고 정이라고도 부르고 그리움이라고도 합니다. 보이고 잡히는데도 아주 얇은 앵프라맹스가 그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찢을 수도 녹일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외로움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0대부터 나는 돈이나 가난 또는 권력, 전쟁에서 비롯된 소유의 결핍보다도 생명의 결핍, 존재의 결여에 대한 그 틈을 메우기 위해서 글을 썼던 것이지요.
어렸을 때 감기에 걸렸던 일을 추억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의 일입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추운 겨울날, 미끄러지고 빠지고 겨우겨우 걸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습니다. 감기에 걸려 열이 막 나는데 기다려도 어머니가 오시지 않아 혼자 누워서 앓고 있었지요. 천장의 그림들이 괴물처럼 보이고 무섭고, 외롭고, 열에 들떠 혓소리까지 할 지경이 되었어요.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머리맡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면서 어머니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았습니다. 나는 그냥 눈을 감은 채로 있었거든요. "네가 이렇게 아픈 줄도 모르고 이제야 왔구나” 하시면서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 있는 내 이마를 짚어주셨습니다. 그때였지요. 어머니의 그 차가운 손과 열이 오른 내 뜨거운 이마 사이 그 차가움과 뜨거움 사이에 아주 엷은 막이 느껴지는 겁니다.
냉기와 온기 사이의 아주 얇은 틈, 그게 뒤샹이 말하는 앵프라맹스라는 것을 안 것은 휠씬 뒤 대학에 다니면서였지요. 그런데 뒤샹보다 먼저 나는 어머니의 이마를 짚는 손에서 그것을 느꼈던 겁니다. 인간으로서는 깰 수도 찢을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아주 얇디얇은 막이었습니다.
내가 어머니를 이렇게 그리워하는데 어머니가 날 이렇게 사랑해주시는데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앵프라맹스의 단층이 있습니다. 목숨을 건 남녀 사이에도 의리를 따지는 친구지간에도 그것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조금 전 자기와 지금의 자기 사이에도 있지요.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는 누구나 그리고 매순간 혼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었지요. 어렸을 때에는 알 수 없이 그저 눈물을 흘렸을 뿐이지요. 어머니가 오셔서 반가운데도 그날 느꼈던 어머니의 손과 내 이마 사이의 얇은 막이 평생 동안 나를 따라다녔던 것이지요.
(...생략...)
이미지 출처 : 글로벌 인터넷 미션
이마를 짚는 손. 인간은 절대로 그 사이에 존재하는 앵프라맹스의 얇은 막을 찢거나 넘어설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 틈을 없앨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초월의 힘이요 영성의 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초등학교 때 집으로 돌아오던 그런 가파른 언덕길이 있었으면 싶습니다. 꽁꽁 얼어서 감기에 걸려 눕고 싶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머리맡에 앉아 내 이마를 짚어주실 것입니다. 싸-한 겨울바람을 온몸에 묻히시고 돌아온 어머니, 어머니의 차가운 손, 39도의 신열로 내 이마는 장독처럼 뜨겁습니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나의 마음과 어린 것이 앓고 있는 모습이 딱해서 어쩔 줄 모르시는 어머니의 손이 맞닿습니다. 부딪칩니다. 아! 어머니, 이 세상에서 그 이상의 위안도 평온도 사랑도 없습니다. 평생을 두고 이렇게 절실하게 찾고 기다렸던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이제야 어머니의 손과 내 이마 사이에 깔려 있던 그 얇은 막이 걷히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눈으로 볼 수도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 실체가 아닌 영원한 형용사 아니면 부사인 그 앵프라맹스. 그것이 찢겨 나가는 감동이 내 가슴을 적셨습니다. 50년의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앵프라맹스 없이 어머니의 손이 내 이마를 짚어주시는 것을 느꼈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내가 내 딸에게로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어머니의 손이 내 이마에 빈틈없이 와 닿는 느낌을, 영원한 그 촉감을 얻게 된 것이지요.
그러자 엉뚱하게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예쁜, 움직이는 그림으로 만든 동화 같은 글 한 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요. 하나님께서 아기천사에게 지상으로 내려가라고 명하시니 아기천사는 겁에 질려 “하나님, 사람들이 사는 지상에는 도둑도 많고 위험한 차도 많이 다니고 전쟁도 있다는데 제가 어떻게 인간이 사는 땅에 내려가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에게는 항상 너를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벌써 아기천사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지요. 하나님, 하나님! 아기천사는 하나님을 다급하게 부르면서 이렇게 소리쳤지요. “수호천사의 이름을 가르쳐주셔야 만날 수 있지요.” 하나님은 크게 웃으면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수호천사의 이름은 '어머니'라고 부른단다.”
러브 소나타의 집회가 있었던 날 밤에 나는 보았습니다. 수천수만 개의 불빛이 찬미가의 아름다운 화음을 타고 어둠 속의 돔을 흐르고 있는 것을, 그리고 그 많은 불빛 속에서 내가 흔드는 작은 불빛 하나를 어머니가 보고 계시다는 것을, 민아와 나의 가족, 그리고 내 이웃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앵프라맹스란 말 대신 거북해서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말을 그들을 향해 외쳤지요.
- 사랑해요.
이어령 / ‘지성에서 영성으로’중에서
제비가 물어다준 신앙의 박씨
초등학교 2.3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흑판에 그림을 그려놨어요. 거북이, 토끼, 까마귀에, 맨 나중에는 제비를 그려놓고 서로 속도를 비교하는 숫자를 써놓았지요. 그야 누가 봐도 숫자가 없어도 제비가 가장 빠르다는 것을 반 아이들 모두가 알고 있었지요. 그 당시 한국에서 만주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급행열차를 ‘쓰바메(제비)’고 불렀으니 말이지요.
“제비 빠른 걸 누가 모르나, 정말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것은 가르쳐주지 않고 왜 이런 쓸데없는 것을 가르쳐주지? 집에서 기르는 닭이나 오리도 아닌데, 다른 새들은 사람들을 피해 높은 나뭇가지 위에 둥지를 틀거나 깊은 풀숲에 몰래 알을 낳는데 어째서 제비는 사람 사는 집에 들어와 겁도 없이 집을 짓고 새끼까지 칠까? 그런데도 제비 잡아먹었다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준 흥부 이야기는 있으니, 이게 대체 무슨 이치일까?” 공부하다 말고 이런 궁리를 합니다.
궁금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지요. 이미 제비가 먹잇감을 물고 둥지로 돌아오면 새끼 제비들은 제가끔 입을 벌리고 서로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런데 어미 제비는 어떻게 먹이를 준 녀석과 주지 않은 녀석을 골라 먹이를 고루 줄 수 있는지요? 만약 어미 제비가 새끼들에게 원칙 없이 아무렇게나 먹이를 나눠준다면, 어느 녀석은 배 터져 죽고, 또 어느 녀석은 배고파서 죽겠지요.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면 어른들은 실없는 말이라고, 쓸데없는 걸 묻는다고 야단을 치지요. 더구나 교실에서 선생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선생님을 놀리고 수업을 방해한다고 뺨을 맞지요. 호기심에 차 눈이 반짝이던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오자마자 그 눈빛이 흐려지고 입은 다물게 됩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말하지요. 애가 철이 들었다고 말입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말이지요.
의문을 품었기 때문에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커서 결국 제비가 왜 사람 집에 둥지를 틀고 어떻게 배고픈 제비 새끼를 알아보고 먼저 먹이를 주는지 알게 된 것이지요. 어미 제비는 새끼들 가운데 주둥이를 가장 크게 벌린 녀석에게 먹잇감을 물린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먼저 먹이를 받아먹는 녀석들은 아무리 입을 크게 벌리려고 해도 그렇게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미 제비는 그냥 입을 크게 벌린 녀석에게 먹이를 주면 되는 겁니다.
이 섭리를 알면 요즘 왜 제비의 개체 수가 줄어드는지 그 재앙의 원인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농약을 뿌리고, 도시는 공해로 오염되면서 제비의 먹잇감들이 줄어든 것입니다. 옛날엔 수 분 간격으로 먹이를 물어다주었지만, 지금은 수십 분 간격으로 먹이를 물어 온다는 거죠. 그래서 먼저 먹은 녀석들은 그사이에 소화가 다 되어버리고, 다른 제비와 똑같이 입을 크게 벌릴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러니 어미 제비가 헷갈릴 수밖에 없지요. 신호 체계에 노이즈가 생겨나 무엇이 가짜 정보이고 무엇이 진짜 정보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제비가 우리 주위에서 점점 사라지게 된 것은 날아다니는 속도가 떨어져서도 아니요 단순히 공해 때문에 먹잇감이 줄어서도 아닌 것이지요. 그 소통 신호 체계의 교란으로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제비 세계에도 바벨탑 현상이 일어나게 된 까닭입니다. 인간 사회에도 이와 흡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지요.
제비는 왜 모든 새들이 무서워서 접근하지 않는 사람의 집에 둥지를 트는지, 그리고 어미 제비를 보면, 왜 제비들이 일제히 입을 크게 벌리며 짹짹거리는지, 선생님이 가르쳐주지 않은 진짜 해답을 구하다보면, 지성을 넘어 영성으로 가는 계단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교과서가 아니라 성경에 그 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성서를 펴보세요. 분명히 제비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왜 제비만은 사람을 믿고, 날 잡아먹으라는 듯 사람들이 사는 집에 집을 지을까요?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천적들이 덤비지 못하지요. 인간을 믿고 자신의 목숨을 맡긴 제비들은 인간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과학은 이런 해석을 할 수 없지요. 교회에 와서 목사님에게 배워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믿고, 안심하고, 갑아먹힐 각오를 하고, 가장 가까운 안채에 떡하니 집을 짓는 제비를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해충을 잡아주는 착한 익조(益鳥)를 말입니다,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지성과 영성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의심 속에서, 끝없는 의문 속에서 지성은 커집니다. 하지만 사람 집에 집을 짓고 살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 그러한 짐승들의 슬기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제비처럼 믿어야만 인간의 힘을 빌려 다른 짐승들의 위협에서도 보호를 받고 편안하게 살 보금자리를 얻어 새끼들을 안심하고 키웁니다. 심지어 다리가 부러져도 흥부가 와서 치료를 해주고 말이지요. 그런데 놀부를 보세요. 흉부가 부자가 되었다고 하니까 일부러 제비 발목을 분지르고 나서 고쳐주지만 얻은 것은 재앙뿐이었지요. 마찬가지로 누가 하나님을 믿더니 부자가 되었다. 병을 고쳤다는 소리를 듣고 교회에 나가는 거짓 신자들은 놀부처럼 빈 박, 재앙의 박씨밖에는 얻지 못해 보세요. 성경 속의 제비 이야기는 바로 믿음의 박씨였던 거지요.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재단 옆에서 자기가 안식할 사람 사는 그 대들보 옆에서 제비가 새끼를 보는 집을 얻었나이다.
이렇게 시편 84편 3절에 제비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비가 사람 사는 집에 둥지를 트는 것처럼, 하늘나라의 하나님 집에 굳건한 믿음을 갖고 집을 지어놓으면 해로운 것들이 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알을 낳으면 하나님의 섭리대로 먹일 수 있습니다. 제단 옆에 제비처럼 믿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면 독사도 까마귀도 독수리도 오지 못합니다. 내 알은 틀림없이 부화할 것이요, 내 새끼는 하늘을 나는 날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제비를 빌려 성경에 쓰인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예레미야 8장 7절을 볼까요.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제비는 정확히 봄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날아옵니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오면 봄이 오는 겁니다. 이렇게 신의를 지키는 것이지요. 하지만 너는 제비만도 못하다. 제비는 때를 알아서 정해진 때에 오는데, 너는 돼 때가 됐는데도 오지 않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아, 한국 백성들아, 때를 알고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것, 가장 흔한 법을 지키는 것도 못하니, 제비만도 못하지 않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시편,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제비는 우리에게 귀한 박씨를 물어다줍니다. 이것이 지성으로는 얻을 수 없는 영성의 선물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제비 자체가 영성, 하나님의 영이 육화된 에수 자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콘솔, 콘솔 console console' 하고 울었다고 합니다. 콘솔은 제비 소리 의태어인데, 이는 제비가 인간들을 위로해주는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걱정 마라, 걱정 마라’하고 부활을 예고한 것이지요. 그래서 기독교 문화권에서 제비는 비둘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서양 문화에서 제비는 갈증, 굶주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제비 새끼들이 먹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앞에서도 말했지만, 어미가 오면 주린 녀석도 배부른 녀석도 막무가내로 입을 벌립니다. 얼마나 배고프고 목마르면 그렇게 먹고도 계속 보채는 것일까요? '스왈로우swallow'가 동사로 쓰이면 ‘마시다, 먹다’가 되어서, 자연히 제비하면 굶주림과 갈증이 연상되는가봅니다. 그 갈증과 굶주림을 모르면 영성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막처럼 척박한 환경에서의 굶주림과 갈증이 정신적으로 승화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성서는 일관해서 가장 굶주린 단계인 배고픔부터 가르쳐주고, 거기에서 나아가 또 다른 배고픔과 갈증을 가르쳐주고, 마지막에는 영성에 도달하는 갈증을 가르쳐줍니다. 내가 성서에서 발견한 것은 갈증과 굶주림이 영성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의 갈증과 굶주림은 지적인 것이어서 서가의 책들과 두꺼운 백과사전으로 족했지만, 영적인 굶주림과 갈증은 누가 채우고 적셔줄 수 있는가요?
이어령 / ‘지성에서 영성으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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