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말과 감정

송담(松潭) 2017. 12. 24. 17:53

 

말과 감정

 

 

 

 

 

오늘 당신은 고객 앞에서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발표하려고 보니 중요한 자료 하나가 보이질 않는다. 후배가 빠뜨린 것이다. 그럭저럭 끝마치기는 했지만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당황스럽고 불안했으며, 동시에 직접 다시 확인해보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후배에게 어떤 말을 하게 될까?

 

 ① 첫 번째 유형

 

 “! 너 정신이 있니 없니! 얼마나 중요한 자료인지 몰라? 그거 준비하느라 고생한 사람들이 몇 명인데,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일을 하니!"

 

 ② 두 번째 유형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

 

 ③ 세 번째 유형

 

 “, 정말 당황스러웠어. 중요한 자료인데 빠져 있어서 얼마나 마음 조렸는지 몰라! 너도 놀랐지.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면 안돼. 그 때는 지금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우리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팅 전에 한 번 더 확인하고 서로 교대로 체크하자."

 

 첫 번째 유형은 폭포수형이다. 기분이 나빠지면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고 말을 쏟아내야 속이 후련해 한다. 말의 물줄기가 워낙 세서 상대는 뒷걸음치고 만다. 사실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과도한 감정이 말의 형태로 쏟아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대는 가시 돋친 말에 상처를 입고 나가떨어진다.

 

 폭포수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평가할 때 뒤끝이 없고 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유형은 자신의 감정을 책임질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면서 타인의 감정까지 경계 없이 휘저으려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유형은 '호수형'이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 화가 나도 일정 수준에서 넘어가고 기쁜 일에도 적당히 좋아한다. 주변에서는 이런 사람을 두고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반대로 참을성 있고 속 깊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호수는 고여 있다. 물은 자연스럽게 흐르고 섞여야 하는데 움직이지 않고 고여 있으면 결국에는 썩게 된다. 감정을 무시하거나 묻어두는 일은 일종의 감정 노동이다. 장시간의 노동을 버틸 장사는 없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악취가 피어오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참고 말지’, ‘말해서 뭐해' 하면서 감정을 꾹꾹 눌러두면 그것이마음속에서 차고 넘쳐 결국에는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터져버린다. 아주 사소한 사건에도 욱하며 터지게 되어 있다.

 

 참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지만, 그것은 관계에 더 큰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상대방은 사과할 기회나 설명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죄인이 되어버린다. 감정은 담가두고 발효시키는 게 아니라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다. 감정을 딱 그만큼 어울리는 양과 색으로 표현하는 일에는 언제나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마지막 유형은 수도꼭지형이다. 시원하게 혹은 따뜻하게 물의 온도를 선택하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흐르지 않게 잠가두고 또 필요할 때는 원하는 만큼 조절해서 사용한다. 상대방은 갑자기 쏟아지는 뜨거운 물에 데거나 난데없이 쏟아지는 찬물에 놀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와의 관계에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게 감정 표현이 정확한 사람은 목적에 맞는 말을 꺼내어 사용할 줄 안다. 놀란 마음에 엉뚱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해결해야 할 감정을 모르는 척 미루어두지 않는다. 말과 감정이 조화롭다.

 

 더 나아가 타인과 감정을 나누는 게 자연스럽고 능숙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정을 배려하면서 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도 능숙하다.

 

 이렇게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조절하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바로 '정서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이다. 정서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키고 목적에 맞는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자신의 감정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면서 관계를 맺는 능력까지 뛰어나다.

 

 ‘폭포수형이라면 감정을 정확하게 느끼고 보유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호수형이라면 감정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감정은 내다버리는 쓰레기도 아니고, 금고에 고이 숨겨 두어야 할 금덩어리도 아니다. 고장나면 고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틀고 멈추기를 반복해야 하는 생활필수품이다.

 

 감정이 휘몰아칠 때는 여러 가지 불순물들이 떠올라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떤 것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게 마련이다. 진흙이 떠올라 탁해 보이는 강물도 시간이 흘러 진흙이 바닥으로 가라앉으면 그제야 투명하게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러니 좀 기다려야 한다. 폭풍처럼 거센 감정이 나를 압도하더라도 아주 잠시 동안-때로는 숨을 크게 몇 번 내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기다리면 떠올랐던 불순물이 가라앉고 그사이로 진짜 감정이 얼굴을 내비친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기 진정 스위치를 발견해서 과열되었을 때 그 버튼을 누르고 잠깐 동안 멈출 수 있는 사람은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려낼 수 있다. 내 감정과 상대방의 감정 뒤에 숨은 마음을 알아보고 가장 적절한 말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 2 >

 

 교류분석(Transitional Analysis)이론을 보면,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는 크게 OK 방식과 NOT OK 방식이 있다고 설명한다. OK 방식이란 상대방에게도 이해받을 만한 동기가 있고 잘해내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실행의지가 있다는 것, 즉 상대방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반대로 NOT OK 방식이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대면서 변명하고, 나태하고 게으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실행력 없고 무능력한 사람으 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태도를 뜻한다. 즉 상대방을 미리 '별로인 사람'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은 OK 방식으로 바라보면서 상대방은 NOT OK 방식으로 바라보곤 한다.

 

 “네가 할 수 있겠어?"

 “다 너 때문이야."

 “그럴 줄 알았어."

 “걔가 원래 좀 그래.”

 “뭐가 달라지겠어?"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나의 경험과 지식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의 공식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취급하기 쉽다. 그러니 질문하지 않고 경청하지 않는다. 혹여 질문을 하더라도 이미 답이 정해진 유도 질문이거나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위한 시험 질문인 경우가 많다. 반면 상대를 OK 방식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즐겨 사용한다.

 

 “잘 해보고 싶었을 텐데 속상하겠네."

 “우리가 함께 책임져야 할 일은 뭘까?"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게 있니?"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야. 내게 말해줄 수 있니?"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당신의 공식도, 타인의 공식도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힘든 상황에서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자신만의 공식을 만들어낸다. 타인의 눈에는 부족하고 부적절해 보일 수 있지만 감히 비난하고 몰아세울 일은 아니다.

 

 어제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은 완벽해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NOT OK에서 방황하는 시간보다 OK에서 머무르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간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 다양한 공식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선입견을 조금씩 부수는 게 좋다 그러한 시도를 두려워하지 말자. ‘불편함’, 뒤에 있는 다양함을 즐겨보자. 삶의 반경을 넓혀주는 다양한 책들을 가까이 해보자. 그것이 결국 나도 너도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도와준다. 그것이 당신의 말 그릇을 키우는 자양분이 된다.

 

 

< 3 >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이런 말까지 꺼내기 조심스러웠을 텐데 왜 마음을 바꾸게 되었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녀는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대화 중 함부로 말을 가로채지 않고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성급하게 조언하지 않았던 것이 차곡차곡 쌓여 나에 대한 믿음

이 생겼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비밀을 지켜준다고는 하지만 이 사람도 팀장이지 않은가. 팀장끼리는 만날 일도 많을 텐데 어떤 식으로든 전해지지 않을까.’

 수많은 의심과 불안이 잦아들고 나서야 그녀는 숨겨진 진심을 내게 꺼내 보였다.

 만약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에 내 말만 바쁘게 했다면, 나만 신나서 대화를 이끌고 갔다면 우리는 끝날 때까지 가짜 목표를 가지고 씨름했을 것이다. 의미 없는 과제를 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안전한 사람에게만 속마음을 열어 보인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아는 척하며 평가하지 않을 사람,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성급히 결론짓지 않을 사람에게만 이야기를 나누어 준다.

 

 많은 사람들이 대화 중에 눈치를 보느라 진실을 은폐한다. 특히 아이 들이 그렇다. 부부 사이에도 정작 풀어내야 할 속내는 꺼내지 않고 세금이나 경조사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서로 듣기 좋은 말만 주고받는다.

 

 “, 좋은 생각이에요."(별로라고 해도 어차피 할 거잖아요.)

 “어쩜 그렇게 완벽하세요"(그래야 좋아하잖아요.)

 ", 저는 괜찮아요."(안 괜찮다고 하면 또 잔소리 할 거잖아요.)

 

 정말 좋을까? 진짜 괜찮은 걸까? 상대방의 말을 자꾸 가로채면 그들도 듣기 좋은 말, 오가기 좋은 말, 그럭저럭 때울 수 있는 말들로 시간을 채운다. 결국 들어야 하는 말을 듣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윗사람일수록 바닥에 가라앉은 이야기는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다.

    김윤나 / ‘말그릇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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