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이 ‘대체’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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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구동향자료를 보면 1인 가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반려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결혼이나 가족관계를 맺는 대신에 동물과 사는 삶을 적극 선택하는 모습을 자주 접한다. 인간과 동물이 특별한 인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날 도시인의 상당수가 이전과는 다른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반려동물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외로움을 극복하거나 상처를 치유하는가 하면 나름의 행복을 도모하는 일의 강도가 무척 ‘세졌다’는 점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와의 피로감 높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대신해 그 자리를 반려동물로 대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그만큼 무한경쟁사회로 초래된 인간 간의 피로감, 굴곡 심한 감정의 교류와 왜곡되고 피곤한 소통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인간에 대해 여러 환멸을 지닌 사람들이 인간 대신 차라리 언어적, 문자적 소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반려동물을 사랑과 애정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정황의 방증이다.
인간과의 매우 까다롭고 성가시며 공을 들여야 하는 감정적, 언어적, 육체적 관계에 절망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나머지 상처받지 않는 반려견과의 관계를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인간에서 벗어나거나 스스로가 타자화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삶보다는 인간과 반려동물의 삶이 늘어나고 있거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분명 반려동물들은 인간이 안기는 상처와 배신, 치욕 대신 즐거움과 위안을 준다. 물론 그만큼 배려와 돌봄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저마다 행복하게 살고 싶고 외롭지 않기 위해 반려동물에 집착하고 있는 이 현상은 결국 그만큼 현대인들이 인간으로부터 너무 많은 상처를 받고 있고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뜻일 게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2017.7.6 경향신문)
옆집 개 짖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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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개가 내가 현관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짖어대는 소리는 총성을 떠올리게 한다. 옆집 개가 현관에 바짝 붙어 나를 향해 적대적으로 짖어대는 일의 반복은 집 밖에 나가기 전 나를 번번이 머뭇거리게 만든다. 집에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어느 날, 옆집 개의 맹렬한 짖음에 심장에 무리가 왔고, 나도 사족보행하며 똑같이 짖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울부짖다시피 옆집 문을 두드리며 호소했다. “개 좀 안 짖게 해주세요! 집 나갈 때, 들어올 때 매번 깜짝깜짝 놀라고 스트레스 받습니다!” 옆집 현관문 안에서 “죄송합니다…”라고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와 마음이 누그러지고 미안함마저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 다음날 개는 또 짖었고 나는 또 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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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로 고통 받아도 취할 수 있는 공적 조치가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다. 녹음으로 증거자료를 확보해 민원 어플로 문제 제기를 해도 권고 조치에 그칠 때가 많고, 그것마저 같은 건물에 살 때만 유효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원룸촌에서 바로 앞 건물 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뭘 할 수가 없다는 무력감. 민사 소송의 수고로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걸까.
계속 고민하다 보니 좁은 평형 주택을 부실한 방음 마감으로 지은 시공업체, 건물끼리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허용한 공권력, 한 평의 땅을 독점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 서울의 미친 부동산 가격에까지 문제의식이 미친다. 그 점을 고려하면 옆집 세입자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끼지만, 그래도 그 개는 너무 날뛴다. 동물을 도시에서, 좁은 공간에서 키운다는 것은 동물에 대한 책임감에 더해, 이웃에 대한 책임감까지 요구하는 일이 아닐까. 당신이 개의 체온을 느끼고 위로 받으며 사랑스러운 얼굴을 쓰다듬는 동안 당신 이웃은 미쳐가고 있다고요!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2017.6.29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