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적 장식과 선물
대금와전(大金瓦殿) -사진출처 : 중국의 창=
2014년 8월, 어느 학회를 따라 티베트로 여행을 갔다. 여행을 좋아하진 않지만 평소에 ‘금생에 티베트는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지라, 아는 분의 연줄을 타고 한 번도 나가지 않은 학회에 끼어 운 좋게 가볼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공식적으로는 ‘티베트’가 아니라 청해성에 속해 있는 시닝의 타얼사였다. 타얼사는 티베트 불교 개혁 중흥의 주역이고, 달라이 라마 제도를 만든 총카파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사원이다. 총카파의 탄생지에 만들어진 대금와전(大金瓦殿)은 지붕의 기와를 전부 금으로 칠했다고 하여 더 유명한데, 안내자에게 들으니 기와를 칠하는데 금 850Kg이 들었다고 한다. 거의 1톤에 가까운 금을 실내의 불상이나 전을 장식하는 데 쓴 게 아니라 비바람에 일 년 내내 노출된 기와에 칠해놓았다는 말에 다들 당혹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 과도하고 소모적인 장식의 이유에 나름대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원시사회의 ‘비합리적’ 선물 제도 덕분이었다. 북미 인디언인 치누크 족의 말로 ‘먹여주다’, ‘소비하다’를 뜻하는 ‘포틀래치(Potlach)’란 말은 인디언 사회나 다른 많은 원시사회에 존재하는 경쟁적인 선물게임을 지칭한다. 이는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상대에게 선물해야 이기는 게임이다. 선물의 형태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게임이다. “난 이 정도쯤 남들에게 줄 수 있어!” 남에게 주는 것뿐 아니라 보란 듯 담요나 집을 태워버리고 귀중한 물건을 바닷속에 처박아버리기도 한다. 이까짓 거 다 없애버려도 충분할 만큼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년 포틀래치가 벌어지면 엄청난 양의 재물이 파괴되고 소모된다. 부와 재산을 최대한 선물하고 파괴하는 자가 최고의 명에를 얻는다. 그런 자가 대개 추장이 된다.
인디언들처럼 정치적 지위를 얻으려면 경제적 부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고, 경제적 부에 애착이 있으면 정치적 지위에 접근할 수 없게 하는 경우, 지도자의 지위는 부족민의 신뢰를 잃는 순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정치적 지위를 이용해 부를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가 정치적 지위를 보호하고, 정치적 지위가 부를 확대하는 연결고리를 포틀래치가 끊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선물을 통해 각자의 능력과 관대함을 시험하고, 경제적 부와 정치적 지위가 결합되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조르주 바타유는 티베트 사회를 분석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가령 1917년 일 년간 라싸 정부의 총 세입은 약 72만 파운드였는데, 이중 군사비가 15만 파운드, 행정비용이 50만 파운드였고, 나머지는 종교행사비용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시기, 정부의 지출과 무관하게 사원에서 승려들이 소비한 금액은 100만 파운드가 넘었다고 한다. 정부 예산 전체보다 많은 돈을 사원에서 쓴 것이다! 이런 식의 소모를 통해 부가 축적되어 성장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티베트 사원에서 사용한 돈이 단지 소모적 장식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버려진 아이나 의지할 곳 없는 노인을 부양하고, 일찍 출가하는 이들을 모아 먹여살리는 등의 보시를 역으로 대중에게 베풀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사는데 비추어 ‘쓸모없는’ 장식에 부를 소모해버리는 것은 아무리 인디언 얘기를 끌어들인다 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가난한 나라 티베트에서 말이다. 그런데 잉여의 부를 소모하지 않고 축적하여 다른 데 사용하는 경우를 비교해보면, 이런 소모가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이해하기 쉽다. 바타유도 이를 위해 티베트 사회와 이슬람 사회를 대비하여 분석한다. 외부의 침입이 있어도 군대를 만들지 않거나 최소 규모만 유지한 티베트와 달리 이교도와의 성전이 중요했던 이슬람 사회는 쓸데없는 모든 소모나 낭비를 저지하여 부를 축적했고, 그렇게 축적된 부는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는 종교생활마저 군사적 필요성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요컨대 “이슬람이 전쟁을 위해, 근대 사회가 산업발전을 위해 잉여의 전부를 축적한 반면, (티베트, 몽골의)라마교는 잉여를 명상의 세계를 위해, 세계 속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놀이를 위해 바쳤던 것이다.(<저주의 몫>,152쪽)”
이진경 / ‘불교를 철학하다’중에서
가까운 자가 아니라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라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의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그걸 얻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은 깨달음을 얻지 못해 무명 속에 사는 중생이기 때문이다. ‘보살행’이란 깨달은 사람처럼 사는 삶을 지칭하는 말이다. “네가 만나는 이들에게 최대한 기쁨을 주고 최대한 슬픔을 덜어주며 살라”고 요약될 수 있는 자비행은 이런 보살행의 일부이다.
자비가 설하는 실천의 윤리학을 ‘기쁨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흔한 말로 ‘사랑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흔한 사랑의 언행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누구나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 혹은 친구나 연인을 사랑하지 않는가? 사실 일부 생물학자들은 그런 사랑의 이유는 물론,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사랑의 강도조차 유전자라는 자연적 본능을 통해 설명한다. 본능에 속하는 것이라면, 굳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다들 하는 것 아닌가? 그걸 굳이 ‘가르침’이라고 내세울 이유가 있을까?
세간에서 행해지는 ‘자연적’인 사랑은 유전자의 비유를 굳이 끌어들이지 않아도,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향해 있다. 가까운 만큼 더 사랑하고, 멀어지면 덜 사랑한다. 낯선 이들을 사랑하기 어렵고, 경계선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나 적의 편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건 더더욱 어렵다. 반면 자비의 교설은 평등심을 요구한다. “진정한 자비심을 일으키기 위해선 우선 평등심을 담아야 합니다.(달라이 라마) 평등심을 가지라는 말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사랑하라는 말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 친한 사람과 낯선 사람, 내게 호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차별을 두지 말고, 기쁨을 주거나 슬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동등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생물학자가 말하는 ‘본능적’사랑의 감정에 반한다. 왜 굳이 그래야 하는가? “우리 자신의 친구들에게(즉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사실은 집착입니다. ‘나의 것’이고 ‘나의 친구’이고 ‘나’를 위해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집착입니다.(아름답게 사는 지혜)”
평등심을 갖는 자비는 또다시 “모두를 사랑하라“는 뻔한 말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니체는 ”네 이웃에게 등을 돌려라“는 까칠한 말로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비판한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가까이 이웃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설파한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이웃 주민이 아니라 멀리서 온 사람들, 동향인이 아니라 이방인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비슷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나와 이질적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쉽고 자연스러운 것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행해지지만, 낯설고 쉽지 않은 것은 애써 가르쳐도 행하기 어렵다.
이진경 / ‘불교를 철학하다’중에서
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
프로이트나 심리학자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의 신체가 유기적 전체가 아니라 ‘부분 대상’들의 집합임을 지적한 바 있다. 아기의 입은 엄마의 젖가슴에 반응하는 부분 대상이지,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분화된 ‘기관’이 아니다. 그래서 가짜 젖꼭지를 빠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을 얻는다. 아이들이 자기 신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임을 알게 되고, ‘자아’가 형성되는 것은 18~24개월경이라고 한다. 거울에 있는 자기 모습을 알아보고 좋아하는 시기가 바로 그때다. 이 시기를 정신분석가 라캉은 ‘거울단계’라고 부른다.
이때까지 뇌의 신경세포들은 1,000조 개 정도의 시냅스로 연결된다. 우주 전체의 별보다 많은 숫자다. 그런데 자아가 형성되는 것은 행동이나 사고에 일정한 패턴이 만들어짐을 뜻한다. 그에 따라 연결되어 있던 시냅스 가운데 사용하지 않는 것을 단절시키는데, 이때 3분의 2 정도의 시냅스가 단절된다. 모든 방향으로 열린 잠재력이 ‘자아’라는 말로 요약되는 반복적 선택지만 남겨두고 축소되고 소멸되는 것이다. ‘나’라고 부를 어떤 인격이 형성되는 과정은 엄청난 수의 시냅스와 그것이 할 수도 있었을 거대한 잠재성의 축소 내지 소멸을 동반하는 것이다. 어떤 게 살아남을 것인지는 특정한 뉴런들을 활동하게 자극하는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
자아란 이처럼 외부조건에 의해 활동을 지속한 뉴런과 시냅스로 이어진 그 연결망과 상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가령 아이들은 12개월경 이전에는 모든 소리를 구분할 수 있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모국어에서 아무 역할을 하지 않는 소리를 구별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자아 내지 인격의 형성이란 특정한 것만 알아듣고, 특정한 방식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체적 제한과 함께 한다. 이는 그나마 남은 3분의 1의 시냅스마저 끊어지게 한다. 흔히 뇌세포의 10퍼센트도 사용하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는데,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뇌세포는 계속 생성될 수 있고, 뉴런들은 새로운 연결에 대해 열려있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낸다. 예전에 심리학자들은 세 살 정도면 사람의 성격이 확립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성격은 평균 오십 살이 되어서야 안정적으로 된다.”고 한다. 사실 우리의 뇌는 지극히 유연하고 가변적이어서 그 이후에도 계속 변화되고 재구성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성격도 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원래의 ‘자아’나 ‘진정한 나’ 같은 건 없으며, 실존주의자들의 말처럼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려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다. 자아는 환경이나 관계 등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그때마다 만들어지는 점정적인 안정성을 뜻할 뿐이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남의 얘기를 잘 듣지 않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실패나 불화에서 배우려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아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분별하고 판단한다. 거기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싫어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세상이 모두 자기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셈이다. 그러나 실재론 그리 될 리 없으니, 이들의 삶은 사실 힘들고 피곤하다. 이들 옆에 있는 사람, 이들을 만나야 하는 사람들도 힘들고 피곤할 것이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 ‘권위적’이다. 자신이 아는 것이나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남들이 의당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의 시야 안에 갇혀서 새로운 것을 받아드리지 않고 변할 줄 모른다면, 비록 생물학적 나이가 삼십대라도 이미 충분히 ‘늙은’ 것이다. 오십 살 정도가 되어야 자아가 안정된다는 말은 사람들이 저 유연하고 열린 젊음을 잃고 자아 안에 갇혀가는 시기가 대개 그 시기라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나에게도, 남에게도,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남에게는 폐가되고, 나에게는 안타가운 어떤 상태를 표시할 뿐이다.
이진경 / ‘불교를 철학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