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생각의 계단

송담(松潭) 2017. 8. 6. 16:42

 

생각의 계단

 

 

 

File:StepByStep.png

  이미지 출처 : DPC 위키 홈

 

 

내가 이걸 왜 하는지를 모르면서 무언가를 공부한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영어라는 과목이 그랬습니다. 고백하자면, 당시 영어 점수 고득점에 대한 제 욕망은 공포에서 출발했습니다. 미래의 내가 일하게 될 곳에서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할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이력서에 적힌 영어 점수가 별로라는 이유로 지원한 회사에서 나를 떨어뜨리면 어쩌지 하는 공포 말이죠.

 

 그 공포가 몇 권의 토익 교재를 사게 만들었고, 토익 학원 수강증을 끊게 했습니다. 그 공포는 비단 저만 느꼈던 것이 아니, 대한민국 공교육 12년을 받은 다수의 집단 공포였습니다. 공포를 느낀 친구들과 함께 간 학원에서는 긴 지문을 다 읽지 않아도 답을 빠른 시간 안에 골라낼 수 있는 테크닉 같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문제는 푸는 것인데, 우리는 답을 고르는 법을 배웠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듣기 시험에서 질문이 ‘what’으로 시작하면 명사로 시작하는 답을 골라라 하는 식의 기술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기술은 역시 기술이었습니다. 점수가 올라가더군요. 하지만 당시에 배운 그 영어 기술들이 정작 외국인 앞에 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 시절의 토익 공부가 제 인생에 남을 문장 하나를 선물했다는 겁니다. 지금은 출처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문장.

 

 

 언어는 일정한 기울기로 늘지 않는다. 계단처럼 는다.

 

 

 

 

 

 당시 영어로 버벅거리던 제게 이 두 줄의 문장은 상당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내 영어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 것은 내가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기 위한 지루한 직선 주로위에 있기 때문이었으니까요. 내가 지금은 벽에 부딪힌 것 같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이것은 벽이 아니라 다음 계단의 시작점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같은 팀에서 일하던 장준호라는 후배가 눈에 띄게 표정이 어두워진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시절 그 후배는 아이디어를 내는 족족 가루가 되는 중이었습니다. 가루가 되어 괴로워하던 그 후배가 먼저 밥을 사 달라고 했는지, 제가 먼저 사준다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회사근처 덮밥집에 갔고, “힘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이 열쇠가 되어 어딘가에 있는 자물쇠를 연 것처럼, 식탁 위로 고민들이 쏟아졌습니다. 자신이 요즘 팀에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자신의 한계는 딱 그 정도까지인지 밤늦게까지 고민하고 새벽같이 회사 나와도 아이디어는 왜 거기서 거기인지 그 와중에 대충대충 일하는 것 같은 선배들은 어떻게 자기보다 월등해 보이는 아이디어를 가져오는지.

 

 어떤 말을 해줄까 고민이 들더군요. 그냥 괜찮다고 넘어가기에는 제 눈에도 그 친구의 슬럼프가 꽤 깊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날 저도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불현듯 떠오른 그 생각을 후배에게 전했습니다. 생각에도 계단이 있는 것 같다고요. 지금의 너와 그때의 나도 별다를 바 없다고요. 넌 지금 계단 위에 서 있는 거고, 네가 부딪힌 건 벽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올라서는 계단의 시작점이라고요. 지금은 고통스럽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한 계단 위로 올라가 있을 거고, 나도 그랬다고요.

 

 생각의 계단에서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계단을 오르기는 쉽지 않지만, 일단 오른 후엔 아래 칸으로 내려가는 일은 드물다는 겁니다. 그 후배도 한 번 오른 계단을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다른 회사에 있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회사에서도 좋은 평판을 쌓으며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도 몇 칸의 계단을 스스로 올라섰기 때문이겠죠.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하는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괴로워하고 있을 겁니다. 더 이상은 넘을 수 없어 보이는 벽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경험은 비참합니다. 하지만 더 비참한 건, 나는 결코 못 넘는 벽을 누군가 넘는 모습을 보는 것이죠.

 

 매일 생각하는 일로 월급을 받는 저라고 해서 그런 모습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한계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 때,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위안이 되더군요. 이것은 정말 벽일까, 아니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계단의 초입일까. 부디 이것이 계단이기를 언젠가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다음 계단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기를.

 

 

 

 

 

 

양념만으로 되는 요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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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타투 일러스트

 

 

 

 저는 기교보다 본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기가 좋으면 소금을 덜 쳐라라는 문장을 좋아합니다. 가장 신선한 고기는 그대로 구웠을 때 제일 맛있습니다. 소금만 살짝 처서 말이죠. 최상급 꽃등심을 고추장 양념에 재우는 경우는 없습니다. 양념 맛이 고기가 신선할 때 내는 육즙과 풍미를 다 덮어 버리니까요. 그러니 좋은 고기라는 본질이 있다면, 양념이란 기교를 굳이 많이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본질에 자신이 없을 때 양념에 집착하게 되는 거겠죠.

 

 우리가 나고 자란 이 사회는 양념이 세면 고기는 별로라도 음식 괜찮네 하고 넘어갔던 사회가 아닐까요? 그러니 다들 '양념'에만 집중했던 것 아닐까요? 기교와 테크닉은 잘해 보이는 것이지 잘하는 것은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아이의 논술 실력이 부족하면 책을 읽게 하는 게 아니라, 논술학원에 보내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겁니다.

 

10년도 더 된 오래전 일입니다. 회사에 카피 잘 쓰는 걸로 유명했던 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힘 있는 카피를 쓰면서도 그 속에 담긴 생각도 좋아서 제가 늘 닮고 싶어 하던 선배였어요. 어느 날 그 선배가 A4용지 한 장을 제게 건네주더군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병욱, 수능 몇 점 맞았어? 이거 프랑스 수능시험문제인데 한번 풀어볼래?”하더군요. “시험하면 자신 있죠" 하며 문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죠. 충격적이게도, 단 한 문제도 쉽게 풀 수 없었습니다. 최근에 출제된 문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왜 우리는 스스로를 알고 싶어 하는가?

 

 2. 교양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 보다 우월한가?

 

 3. 나는 내 과거로부터 만들어지는가?

 

 철학적인 질문들은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라는 시험에 나오는 문제들이라고 합니다. 바칼로레아는 무려 나폴레옹 시설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고등학교 졸업 시험이자 대학 입학 자격시험 제도인데, 그 유래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미 한 방송에서 시험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는가'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자세히 다뤘더군요. 방송 중간에 한 프랑스 고등학생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그녀가 한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 학생은 바칼로레아를 통해 하나의 질문에 대해 내 생각의 끝까지 가보는 연습을 한다고 말하더군요. 순간,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생각의 끝까지 가본다. 이 말이 열일곱 살 학생의 입에서 나오다니요. 부럽고 또 부러웠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생각의 끝에서 건져낸 것들의 아름다움을 더 자주 말하는 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기교보다 본질의 힘이 강한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유병욱 / ‘생각의 기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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