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당연했던 것에 질문할 것

송담(松潭) 2017. 9. 11. 14:17

 

 

당연했던 것에 질문할 것

 

 

 

 한 마을에 부부와 시어머니, 한 살배기 아들이 살고 있었다. 밭일을 나간 며느리가 점심때가 되어 돌아오니 치매 걸린 시어머니가 닭죽을 끓여 놓았다고 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솥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닭이 아닌 아들이 들어 있었다. 노망난 시어머니가 손자를 닭으로 착각하고 가마솥에 넣어 삶은 것이었다. 이를 본 며느리는 마음을 추스른 다음 닭을 잡아 시어머니께 닭죽을 끓여 드리고, 죽은 아이를 뒷산에 묻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올 만한 이 아이 유기 사건은 놀랍게도 조선시대에 효부상이 세워진 미담이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질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에는 개인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억압하고 도리라는 이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미덕이었고, 이것은 아무리 울화가 치밀어도 화합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미덕이 있었는데 바로 근면 성실이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몸이 아프거나 다쳐도 빠짐없이 학교에 가면 개근상장을 줬고, 칠판 위에는 근면 성실이라는 급훈이 쓰인 액자가 걸려있었다. 근면 성실을 최고의 미덕으로 배운 건 우리 사회가 제조업 기반의 사회였던 것에 있다. 제조업에서는 창의력이나 개성보다 근면함과 성실함이 가장 필요한 자질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선별되고 교육되는 미담과 미덕으로 아이가 솥에 삶아져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며느리는 감정 불구의 아동학대방조범이 아닌 의연한 효부가 되고, 열이 펄펄 끓어도 학교에 나오는 학생은 타의 모범이 되며,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하고, 이슬람 국가에선 자유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딸을 죽이는 것이 명예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사회가 선별해서 미덕으로 심은 통념은 때론 괴담을 미담으로, 폭력을 명예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사회의 미덕과 통념을 불변의 진리로 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가치는 개인의 선택 영역이고, 우리가 삶을 지탱하기 위해 절실한 건 통념이 아닌 스스로가 세운 신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제학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이의 말에 따르면, 미국 대학에는 브레인 워싱 클래스(Brain Washing Class)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내용인즉, 지금까지 배운 경제학 지식은 모조리 틀렸으니 두뇌를 세척하자는 수업이었다.

 

 우리가 세계적인 석학들의 경제학 이론이 무엇인지 배울 때, 그들은 그 이론의 어떤 점이 틀렸는지를 찾아냈고, 그렇기에 새로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당연했던 것들에 질문하자.

 당신이 믿어온 것이 정말 당신 내면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어느 순간 의심 없이 따라온 타인의 목소리인지 묻자.

 믿어왔던 진리에 대하여 질문할 때

 우리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통념의 자리에 우리의 신념을 채우기 위해

 우리에게도 브레인 워싱 클래스가 필요하다.

 

 얼마 전 고용노동부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에 휴가지에 가서도 바이어와 미팅을 완수한 김 대리의 이야기가 훌륭한 사례로 올라왔다. 휴가 간 직원의 사적 생활을 방해한 회사를 고발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개수작이야.

 

 

 

 

 

세상의 정답에 굴복하지 않을 것

 

 

 동네 커피숍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원어민 강사인 캐나다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내게 우리나라에 와서 이상하게 느낀 점을 이야기했는데, 한국 사람들은 Smart studentGood student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봤을 땐 공부를 못해도 Good student 일 수 있고, 공부를 잘해도 Good student가 아닐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smart=Good이라는 등식에 그녀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잘 산다의 의미 역시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잘 산다고 할 수 있는 요소에는 경제적인 기반 외에도 건강한 신체와 좋은 인간관계, 삶의 철학과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심미안, 일을 통해 느끼는 보람 등 다양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잘 사는 것, 웰빙(well being)이란 오직 부자인 삶, Rich의 의미로만 이야기된다. 왜 우리는 그 많은 가치들을 잊은 채 한 가지 가치로만 수렴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일까?

 

 아마도 '6.25 심성'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테다. 더는 침략당하지 않고, 절망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6.25 심성은 두발단속과 통금시간이라는 군대식 문화와 획일화된 통제를 따르게 했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다른 답을 논하는 것 자체를 불순하게 만들었다. 집단이 강요하는 한 가지 방식과 한 가지 답을 견뎌온 것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했던 우리의 생존방식이었다.

 

 * 6.25 심성

 강준만 교수는 한국인 코드라는 책에서 6.25 전쟁 시절을 살듯이 죽느냐 사느냐, 식의 처절한 삶을 살고 있는 한국인의 삶을 이야기하며, 전쟁하듯 세상을 살고 있는 한국인 의식 심연에 자리 잡은 그 무엇을 ‘6.25 심성이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뿌리내린 생각의 방식은 몇 세대를 걸쳐 이어졌다. ‘100억 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같이 계량화한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게 했던 사회 방식은 ‘5kg 감량, 토익 900 달성같은 개인의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고, 획일적인 사회 모습은 한 가지 답을 좇는 개인의 모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체지방 17%48kg이어야 하고, 밝고 겸손한 성격이어야 하며,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가야 한다.

 

 높은 기준의 단일화된 정답을 이야기하며 정답에 대한 병적인 찬사와 오답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그 속에서 졸지에 오답이 된 개인은 혼자 힘으로 그 부적절함을 견뎌야 한다. 그 결과 우리에겐 정답이 된 소수의 오만과 오답이 된 다수의 열패감으로 응축된 병적인 사회가 남았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다니엘 튜더는 한국이 교육, 명예, 외모, 직업적 성취에서 스스로를 불가능한 기준에 획일적으로 맞추도록 너무 큰 압박을 가하는 나라라 이야기 하며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한국을 불가능한 나라(The impossible country)라 평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는 과연 가능한(Possible) 존재인가. 모두가 날씬할 수 없고, 모두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격일 수 없고, 모두가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갈 수는 없다.

 

 아니, 모두가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은하철도 999에 나올 법한 비정상적인 행성일 뿐이다. 만약 사회가, 세상이 당신에게 어떤 정답을 강요한다면 당신은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 합당하지 않은 정답에 채점되어 굴복하지 말아야 하며 그 정답들에 주눅 들어 스스로의 가치를 절하해서는 안 된다.

 

 좋은 학생에는 여러 정의가 있고

 잘사는 것에는 여러 방법이 있으며

 우리는 각자의 답을 가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오답이 아닌, 각기 다른 답이다.

 

 

진짜 해결책을 찾을 것

 

람에게는 마술적 사고라는 원시적 사고가 있다. 예를 들면 일기예보가 없던 원시시대엔 비가 멈추지 않거나 태풍이 불어닥치는 일은 갑작스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원시인들은 신이 노한 탓에 비가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해 처녀를 제물로 바쳤다. 사실 비는 때가 되면 그칠 테고, 그들의 제물은 결코 비구름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안심한 거다. 이렇듯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겨난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달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바로 마술적 사고다.

 

나도 때묻지 않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반공 교육을 배운 뒤 1년 동안 잠들기 전에 전쟁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다. 나의 기도가 국제 정세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음에도 기도를 하면 전쟁이 나지 않을 거라고 믿은 것이다.

 

우리는 원시인 혹은 열 살짜리 꼬마가 아님에도 여전히 마술적 사고에 기댄다. 홍수를 막기 위해 처녀를 제물로 바쳤던 것처럼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매일 밤 기도를 했던 것처럼, 자신이 통제하기 버거운 일 앞에서 그보다는 쉬운 가짜 해결책을 믿고 안도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지점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동안 가짜 해결책에 매달리고 있던 건 아닌지 문제의 실체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결국은 두려웠던 문제의 실체와 마주하고 걱정을 계획으로 치환시켜야 한다. 물론 그 시간이 버겁고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진짜 해결책을 위해 발을 내디딜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김수현 /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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