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족

극한상황에서도 부부는...

송담(松潭) 2017. 7. 8. 05:16

 

 

극한상황에서도 부부는...

 

 

 

 

 

이미지 출처 : kospi 007의 블로그

 

 

 

 

 슈퍼에서 나오며 윤석은 문득 동네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야트막한 언덕배기 좁은 골목골목마다 숨이 막히도록 들어선 다세대 주택들. 한때 집장사들이 줄줄이 이어놓은 날림 단독주택들은 어느새 모두 세를 많이 받을 수 있는 다세대주택으로 개축되었다. 집 하나에 출구가 두세 개씩 되고 많으면 아홉 세대까지 한집에 살았다. 윤석이 세들어 살고 있는 집도 시유지만 아니었어도 벌써 다세대주택이 되었을 것이다. 그집은 도로에 면한 일종의 무허가주택이어서 주인이 용도를 변경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덕분에 윤석과 미라가 이토록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재개발조합에서 곧 철거를 시작할 것이 거의 확실했고 그렇게 되면 윤석네도 어차피 이사를 나가야 했다. 받아낼 수 있는 보상금으로는 이 지역에서 이사 갈만한 곳이 거의 없었다. 서울에서 밀려나와 여기가지 왔는데 이제는 더 멀리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돈도 돈이지만 미라를 받아줄 집주인이 없을 것이라는 게 더 문제였다. 아내가 정신이 좀 오락가락한다고만 해도 집주인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현병 환자는 반드시 살인을 저지르거나 집에 불을 낸다고 믿었다. 그렇게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함께 집을 보러 다닌 소개업자는 잠깐만 속이자고 했다.

 

 “부인을 정신병원 같은 데 보내놨다가 이사 다 끝난 다음에 다시 데여오면 돼지.”

 

 그 제안이 너무 솔깃해서 오히려 윤석은 번쩍 뛰었다. 혹시라도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하게 될까 복덕방 주인에게 도리어 화를 냈다. 그는 미라를 한번 정신병원에 갖다 넣으면 다시는 데리고 나오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를 지탱해온 미신적인 신념들도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미라가 정신병원에 가면 (잃어버린 아들)성민이는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는 비이성적인 믿음. 이 믿음은, 성민이만 돌아오면 미라의 병은 깨끗이 낫게 되리라는 또다른 믿음과도 이어졌다. 그런 믿음을 차치하고라도 윤석은 미라를 버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미친 아내를 떠맡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윤석이 정신 나간 아내에게 기대고 있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매일 전단지를 돌린 것처럼, 남들이 보기엔 아무 희망도 없는 부부관계에서 그는 삶을 지탱할 최소한의 에너지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그에게 미라는 카라반의 낙타와도 같은 존재였다. 목표와 희망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말을 못해도 돼. 웃지 않아도 좋아. 그저 살아만 있어다오. 이 사막을 건널 때까지. 그래도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 끔찍한 모래지옥을 함께 지나가겠는가.

 

 

 김영하 소설 오직 두 사람(단편아이를 찾습니다.’)중에서

 

 * 위 글 제목 극한상황에서도 부부는...’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어느 가출소년의 선물 

 

 

 

   이미지 출처 :시사 인천

 

 

 이 년 후, 한 여자가 소형 승용차를 몰고 마을에 나타났다. 윤석의 창고 앞에 도착한 여자는 차에서 내려 윤석이 폐광에서 내려올 때까지 평상에 앉아 기다렷다. 아직 귓가에 솜털이 보송하고 볼에는 여드름 자국이 남아있는 앳된 얼굴이었다.

 “누구더라? 눈에 익은데.”

 “보람이에요. 이보람. 요 아래 마석리 살던.”

 성민이가 집을 떠날 무렵, 같이 사라졌던 아이였다. 부모 없이 보람이를 키우던 조부모들이 눈물바람을 하며 찾아와 손녀딸을 찾아내라고 몇 달 동안 윤석을 괴롭혔었다. 결국에는 그들도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는 윤석을 찾아오지 않았다.

 “여기는 웬일이야? 성민이는 어쩌고?”

 “실은 성민이 찾으러 왔어요. 혹시 여기 안 왔나 해서요.”

 “떠난 뒤로 소식 들은 적 없다.”

 보람은 할 말이 있는 듯 하이힐 뒤축으로 마당을 긁으며 미적거린다.

 “난 다시 올라가봐야 하는데.”

 보람은 그제서야 말을 꺼낸다.

 “돈을 가져갔어요. 성민이가요. 제가 모은 돈 다.”

 여자애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큰돈이니?”

 “......저한테는요.”

 “얼마냐?”

 “......오백이요.”

 “......”

 “이해가 안 돼요. 성민이가 왜 그랬는지.”

 “인간은 원래 이해가 안 되는 족속이다.”

 윤석이 여자애를 똑바로 쳐다보며 덧붙였다.

 “이자는 못 준다. 원금만 받아.”

 윤석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섯을 팔아 모은 돈을 장롱에서 꺼냈다. 오백이면 저 여자애에게는 얼마나 큰 돈일 것인가. 그는 돈뭉치를 꺼내 천천히 셌다. 오백만원이 정확한지 거듭 확인한 후, 잠깐 갈등하다가 삼십만원을 더 얹어 봉투에 넣었다.

 

 윤석이 다시 나가보니 여자애는 없었다. 타고 왔던 승용차도 보이지 않았다. 평상 위에는 차량용 베이비시트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직 젖도 떼지 못한 것 같은 갓난아이가 그의 얼굴을 보더니 울음을 터드렸다. 아기 옷섶에 분홍색 메모지가 끼어져 있었다. 성민이 아이에요. 성민이는 떠나고 저도 키울 능력이 없어 맡기고 갑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는 오른손을 내밀어 아이의 작은 손을 쥐었다. 아이는 문득 울음을 그치고는 그를 말똥말똥 올려다보았다. 그는 왼손도 마저 내밀어 아이의 오른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이가 간지러운 듯 발을 꼼지락거리며 좋아했다. 아이의 양손을 놓지 않은 채 그는 오래도록 평상 위에 앉아 그에게 찾아온 작은 생명을 응시했다.

  

 김영하 소설 오직 두 사람(단편아이를 찾습니다.’)중에서

 

 * 위 글 제목 어느 가출소년의 선물'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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