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후회
강기재
이미지 출처 : chosun.com
아내가 노인병원에 입원한지 삼년 째 접어들었다. 부부의 연을 맺은 지 마흔네 해, 중병에 시달려 온지 스무 해만에 어쩔 수없이 장기요양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 좀 편하여 질만하니 병이 난다더니 그럴 겨를도 없이 병으로 고생만 거듭하였다. 노후에 둘만이 오붓하게 살아가리라던 생각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은 한 낱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소리 없이 찾아온 당뇨합병증은 신체 이곳저곳을 차례로 갉아먹듯이 아내를 고통 속에 맴돌게 하였다. 급성심장병으로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번 하였고 발등의 상처로 발목을 잘릴 법도 하였다. 눈은 거듭된 수술로 거의 실명위기에 이르렀고 극심하던 허리와 다리통증은 대수술로 진정되었지만 또 다른 내장기관의 고장으로 음식물을 제대로 넘길 수 없으니 그 고통을 누가 대신 하리오.
아내의 중병이 나의 무관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젊은시절,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나의 앞길이 열리고 가정을 비롯한 자녀문제도 해결될 수 있으리란 생각에 무작정 앞만 보며 달려갔다. 수평적 부부의 위치는 조금도 인식하지 않은 채 생활비를 벌어준다는 우월감에 오로지 복종과 순증만을 요구하였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란 말을 주례석상에서 수십 번이나 설파 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이를 실천하지 않았으니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을지. 남들에겐 작은 선심을 쓰는 척 하면서도 아내에게 만은 인색 그 자체였다.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로서 진정한 사랑 따뜻한 마음 한번이라도 주었거나 베풀지 않았다. 대신 아내로서의 도리나 임무를 다해주기만 바랐다.
주는 것 하나 없으면서 받기만을 기대하였으며 남들과 비교하여 늘 부족함만 탓하였다. 병들어 신음함을 지켜보면서도 내가 원인 제공을 하였다는 생각을 일순간도 가져본 적이 없다. 오히려 아내가 복이 없어 고생만 한다고 여겼으니 그 죄과를 오늘에 받음이 마땅하리라.
지난날 어느 결혼식장에서 주례선생님이 말씀하신 “여보와 당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원래 여보(如寶)는 보배와 같이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란 뜻으로 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 쓰며 당신(當身)은 마땅히 내 몸과 같다는 뜻으로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쓰는 말이라 하셨다. 이 말이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뒤죽박죽이 되어 서로에게 함부로 쓰다 보니 부부간에 지켜야 할 도리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여자는 남자하기 마련이란 말이 있다. 얼마나 무정 하였으면 지금까지 “여보" 하며 다정하게 불러 본적 한번 없었으니 무슨 애정이 싹틀 수 있었던가. 무관심 속에 반생을 보내면서 그저 의무감으로 대한 부부요 건성으로 살아왔을 뿐이다.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장기입원을 전후하여 들었으니 그 죄를 무엇으로 사해야 할지.
“곁에 있을 때 잘하라”라는 말이 이제야 와 닿는 것 같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을 지키는 이 쓸쓸함은 인과응보의 결과이리라. 병상에서 하얀 천정만 바라보며 하염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아내에게 내가할 수 있는 일은 적지 않은 병원비를 계속 대는 것도 면회를 자주 가는 것도 아니다. 뒤 늦은 후회지만 진정으로 사과하고 용서받는 일이다.
“여보”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요. 용서해주오.
‘수필문학 추천작가화 연간사화집 2017/2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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