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족

효자냐 불효자냐

송담(松潭) 2015. 9. 17. 16:12

 

   

효자냐 불효자냐

 

 

 (.....생략.....)

 

 이리하여 맹교수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였다.

 “옛날 어느 마을에 과부가 하나 살았더래요. 아들과 며느리가 얼마나 잘 하는지 남들이 모두 효자효부 두었다고 부러워하였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어머니는 늘 방이 춥다고 호소하더래요. 그래서 날씨가 서늘해지기만 하면 특별히 정신을 차려서 어머니 방이 춥지 않도록 불을 많이 때고 이불을 펴드리고 새벽에도 추울까봐 군불을 때 드렸는데 그래도 춥다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더래요. 그러던 어느 날 오후에 늙수그레한 할아버지가 대문으로 들어오더니 지나가는 행인인데 배가 고파서 밥 한 술 얻어먹으러 왔다고 하더래요. 아들과 며느리는 정성껏 식은 밥을 차려 드리고 어디로 가는 길인지 여쭈어 보았더니 마누라도 자식도 아무도 없어서 갈 곳 없이 떠돌고 있는 신세라고 하더래요. 아들과 며느리는 의논하여 따뜻한 목욕물울 데워서 목욕을 시켜드리고 새 옷을 가져다가 갈아 입혀 드리고 보니 아주 훌륭한 선비더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오늘부터 며칠 동안 우리 집에서 편히 쉬시고, 홀로 계시는 어머니 말벗이나 되어 달라고 부탁하였대요. 아들 부부는 정신없이 음식을 준비하고 어머니에게 승낙을 받아 함께 이야기나 하다가 주무시도록 하였어요. 그런데 아침이 되어 어머니 방에 문안을 드리러 가보니 음식 장만으로 정신이 없어서 깜박 잊어버리고 불을 때드리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큰 일 났다고 용서를 구하려던 판인데 뜻밖에도 어머니는 불을 많이 때 주어서 따뜻하게 잘 잤다고 하더래요. 하하하 정말로 춥지 않았을까요?”

 “정말 이지요.”

 맹교수는 할머니들이 그렇게 웃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한 술 더 뜨고 말았다.

 “재밌으면 한 자루 더 할까요?” “그래요

 “그러지요, 그럼 어느 마을에 아들만 칠형제를 데리고 사는 과부가 있더래요.”

 “또 과부 얘기네.”

 “과부 얘기 하지 말까요?”

 “해 봐요.”

 

 “그런데 한 밤중이 되어 아들들이 잠들기만 하면 어머니가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새벽녘이 돼야 들어오거든요. 그래서 첫째 놈과 둘째 놈이 잠든 척하고 있다가 두 놈이 어머니 뒤를 밟아보았는데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엄동설한인데도 발을 벗고 시냇물을 건너서 아랫마을에 혼자 사는 홀아비 집으로 가더래요. 가더니 홀아비 영감과 무슨 이야기를 하던지 깨가 쏟아지도록 이야기를 나누더래요. 그래서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칠형제가 나가서 돌을 주어다가 시냇물에 다리를 놓아서 어머니가 편하게 다닐 있도록 해드렸어요. 칠형제는 효자인가요. 불효잔가요?”

 

 “당연히 효자지요.”

 “어째서요?”

 “어머니를 고생하지 않게 해드렸으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수절하지 못하게 자식들이 방조한 셈이니까 불효자 아닌가요?

 “그래도 효자는 효자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칠형제를 효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불효자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한편으로는 효자고 한편으로는 불효자니까요. 그런데 효자 두고 싶어요?”

 “그럼요.”

 “그러면 칠형제가 놓은 다리 이름을 무어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효자교? 불효자교?....... 한편으로는 효자고 한편으로는 불효자니까 세상 사람들이 부르기를 효불효교라고 부르더래요.”

 “그렇지.”

 “칠형제는 복을 받았을까요? 아니면.......”

 “당연히 복을 받았지요.”

 “그래요. 칠형제는 복을 받고 잘 살다가 죽은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서 북두칠성이 되었대요. 북두칠성 보셨지요?”

 “그럼. 호호호.”

 “그래서 그 다리를 칠성교라고도 부른대요. 칠성교는 지금 진천에도 있고 경주에도 있고 사방에 있대요. 한국에는 효자가 많았으니까요. 박여사님, 이런 얘기는 해도 괜찮아요?”

그럼요. 참 좋은 이야기네요.”

 


지대용/ ‘맹교수의 사랑방 이야기중에서

 

 

 

  < 독자 이야기 >

 

 나의 어머니는 내 나이 30, 어머니 나이 53세에 홀로되셨다. 아버님께서는 56세의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는데 어느 날, 홀로 되신 어머님 친구들로부터 니 엄마 시집보내드려야 한다.”는 애기를 들었다. 당시 어머니는 아직 젊으셨고 어머니 친구분들은 큰 아들인 내가 동의만 하면 어머니에게 재혼을 추진할 기세였다. 그런데 당시 나는 추호도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반대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무 기색 없이 아들의 허락(?)없음을 수용하시고 곧바로 기독교를 택하시어 종교생활로 고뇌를 삭이시면서 장남 가족과 함께 21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내가 어머니의 재혼을 원천봉쇄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으나, ‘왜 그때 어머니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리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이 내가 초로(初老)의 나이에서야 비로소 들었다. 그때 만약 어머니께 새로운 남자를 만나게 해드렸다면 당뇨도 빨리 발생하지 않고 더 오래 사실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생각이라면 어머니께 새로운 친구나 짝을 찾아드리는 게 효도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께 효자가 아니라 불효자였던 것 같다.

 

지금 고향의 산소에는 어머님과 아버님이 나란히 누워 계신다.

어머님께는 불효자였지만 아버님께서는 혹시 나에게 잘 했다.’라고 하실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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