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포르노의 시대에는 에로스의 지속성이 담보하는 진리가 사라진다. 이때 지속성은 에로스의 지속성이다. 지속성이 없다는 것은 에로스가 사라졌다는 증거다. 에로스 없는 사회에서는 포르노가 창궐한다. 포르노는 정념이 없는 사랑, 물신화된 사랑이다. 포르노는 섹스의 과잉이 아니라 섹스의 부재를 가리킨다. 포르노에는 성기의 결합만이 있을 뿐 에로스가 깃들 여지가 없다. 에로스 자체를 말끔하게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포르노는 섹스가 없는 섹스, 즉 섹스의 공회전이다.
섹스 없는 포르노는 아무리 엑셀레이터를 밟아도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 자동차나 마찬가지다. 포르노의 음란함은 이성애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죽음까지 치달을 수 있는 욕망의 뜨거움이 제거된, 차갑고 건조한 오직 성적 긴장을 해소하기게 급급한, 그렇게 소비되는 섹스와 포르노그래피는 진짜 사랑을 침식하고 파괴한다.
오늘의 시대는 에로스가 아니라 ‘섹시함’을 미적 자본으로 추켜세우고, 그것을 증식시키고 소비하는 것에 몰두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할 자본이다. 전시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다.
오늘의 사랑은 장애와 위기를 만나고 극복하면서 단단해질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사산한다. 오늘의 사회에는 사랑을 흉내 내는 덜 익은 사랑, 서툰 사랑, 편협한 사랑, 이해타산에 춤추는 사랑들이 바글대며 들끓기 때문이다. 사랑에 목숨을 걸던 예전에 견줘 오늘의 사랑은 위엄이나 명예를 잃은 채 쪼그라들고 남루해졌다. 그것은 오늘의 사랑이 위험과 모험이 배제되고, 열정과 신비가 휘발된 채 편의점에서 쉽게 사는 소비재 같이 지나치게 가벼워진 탓이다.
< 2 >
사랑은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중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다. 사랑은 본성적인 것의 영역에 속하고, 생명의 요청이다. 다른 것은 힘들어도 끊을 수 있는 데 반해 사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사람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의 숨은 정체성과 자아를 드러내고, 나에게서 없는 것을 상대에게 구하는 경험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사랑은 사랑하지 않음에서 시작한다. 사랑은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고, 타자를 통해 존재의 기쁨과 의미를 얻으려는 시도다. 사랑은 기쁨과 생기, 거기에 더하는 화사함으로 사랑하지 않음을 수치로 바꾼다. 사랑의 기쁨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기쁨은 상속자도 어린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쁨은 그 자체만을 원하며, 영원을, 같은 것의 반복을 원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영원히 그대로이기를 바란다" 사랑은 존재의 결핍과 부재를 채우고 메우며 충일과 충만을 일궈낸다.
사랑은 사람을 분주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자들은 확실히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견줘 더 생기 있고 활기차다. 사랑하는 자들이 사랑을 대체로 자랑스러워하는데, 반면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사랑하지 않음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는다.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이 무능력하고 우둔하다고 느낀다. 사랑하지 않음은 고갈과 부재를 내면화하면서 그것을 견디는 일이다.
사랑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타산적 결혼에서 연애결혼으로 이행하는 근대 이후로도, 여전히 결합의 정당한 근거이자 준칙이고, 생명의 본성으로 꼽히는 일이었다. 사랑이 의미의 원리, 생명의 원리에 속하는 한에서 제일의적 가치의 지위를 잃은 적이 없었다. 사랑이 존재의 의미화라면 사랑하지 않음은 아무것도 아님 속에 웅크리는 것이다.
장석주/ ‘사랑에 대하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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