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이끄는 사람
초등학교 때 전교 어린이 부회장을 맡았다. 학교에 행사가 있는 날이면 학우들의 오와 열을 맞추거나 몰래 떠드는 아이를 잡아내기도 했다. 가끔은 무슨 감투라도 쓴 양 목에 힘을 주고 리더 행세를 했던 것 같다.
물론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반 아이들이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면 선생님은 늘 나를 불러내 책임을 물었다. 당구가 취미인 어느 남자 선생님은 큐대로 내 머리를 당구공 다루듯 콕콕 찔렀고, 전직 배구선수로 의심되는 한 여자 선생님은 출석부 모서리로 내 뒤통수를 강타하기도 했다.
누가 그랬던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아, 정말 고통이 필수인 것 같다. 그때 당구 큐대와 출석부 모서리 덕분에 깨달았다. 리더는 권한만 있는 게 아니라 책임도 따르는 자리라는 것을.
음, 리더의 덕목이 뭘까. 영국의 한 경제학자는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야말로 리더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일리가 있다. 다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내 가슴에는 와 닿지 않는 얘기다.
혹시 모르니 리더의 어원을 한번 들여다봐야겠다. 리더(leader)의 유래에 관련해 몇 가지 설이 있다.
우선 리더는 전장(戰場)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선봉에 나가 싸우는 사람, 먼지를 먼저 뒤집어쓰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중세 유럽에선 리더를 ‘외로움’ ‘인내’같은 단어와 동의어로 여겼다고 한다.
다른 의견도 있다. 단순히 일행보다 앞장서서 걷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여행하는 사람을 위해 장애물을 허물고 길을 개척하는 지도자, 즉 ‘여행을 이끄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라는 것이다.
난 이 견해가 참 마음에 든다. 내 머릿속에 있는 이상적인 리더의 모습은 함께 여행하는 일행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는 자칭 타칭 리더로 불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고 권한과 책임 사이에서 심도 있게 고민하는 리더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 2 >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
몇 해 전, 태풍이 북상하면서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강풍에 건물 기왓장이 뜯기고 간판이 떨어지는 등 사고가 잇따랐다. 그날 난 집 근처에서 가로수치고 굵기가 가느다란 나무 한 그루가 격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녀석은 일렁이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왼쪽으로 휘어졌다 오른쪽으로 치우쳤다 하면서 반복적인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성룡이 영화 ‘취권’에서 술에 취한 척 안 취한 척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적의 공격을 피하는 동작과 비슷했다.
반면 허리가 굵고 덩치가 큰 나무들은 비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꼿꼿하게 버티고 있었다. 로마 시대 원형경기장에 들어선 검투사들 같았다. 물러서지 않고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결기가 느껴졌다.
다음 날 초대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콘크리트 조각과 유리 파편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뿌리채 뽑힌 나무들이 치열한 전투에서 고지를 점령당한 패잔병처럼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내가 보았던 가느다란 나무는 어떻게 됐을까? 모르긴 몰라도 ‘오즈의 마법사’에 나올 법한 회오리바람을 타고 높이 치솟은 다음 땅으로 처참하게 추락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예상은 빗나갔다. 녀석은 목숨을 부지한 채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바람에 긁힌 듯한 자국이 보였지만, 녀석은 꽤 당당해 보였다. 뿌리는 흙을 굳건히 움켜쥐고 있었고, 몸에서 떨어져 나간 줄기와 이파리도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은 뭐랄까, 자신의 죽음을 예상했던 미천한 인간을 한심하단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그것 봐, 뭐라고 했어?”라고 한마디 하는 것 같았다.
난 녀석이 전생에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초야에서 수양에 힘쓴 선비일지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순간, 녀석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소곤소곤 귀에 감겼다.
“여보게, ‘부드러움’에는, ‘강함’에 없는 것이 있다네. 그건 다름 아닌 생명일세. 생명과 가까운 게 부드러움이고 죽음과 가까운 게 딱딱함일세. 살아 있는 것들은 죄다 부드러운 법이지.”
<3 >
가능성의 동의어
중학교 때 사소한 잘못으로 교무실에 불려 간 적이 있다. “선생님이 너 1층으로 오시래”라는 친구 녀석의 잘못된 높임법을 듣자마자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나는 별수 없이 내려갔다.
난 교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를 악물었다. 제자에 대한 사랑의 구타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섭기로 소문났던 학생부 선생님은 혼을 내기는커녕 이면지 한 장을 커내더니 “여기에 네 장점을 써 보자”라며 당시엔 듣기 어려웠던 청유형 문장을 구사했다.
칭찬과 지적이 적절히 혼재된 면접이 끝날 무렵, 선생님은 “너처럼 가능성이 있는 녀석이 그러면 안 된다.”하셨다. 난 가능성이란 낱말이 참 듣기 좋았다. 내게 그 표현은 “아직 널 믿는다...”는 말로 들렸으니까.
당당하게 교무실을 나서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사람 보는 ‘눈’이란 건 상대의 단점을 들추는 능력이 아니라 장점을 발견하는 능력이라는 것과, 가능성이란 단어가 종종 믿음의 동의어로 쓰인다는 것을.
< 4 >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싸워야 할 대상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나’를 향해 칼끝을 겨눌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자신과의 싸움보다 자신과 잘 지내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5 >
화향백리 인향만리
꽃은 향기로 말한다. 봄꽃은 진한 향기를 폴폴 내뿜으며 벌과 나비와 상춘객을 유혹한다. 향기의 매력은 퍼짐에 있다. 향기로운 꽃 내음은 바람에 실려 백 리까지 퍼져 나간다. 그래서 화향백리(花香百里)라 한다.
다만 꽃향기가 아무리 진하다고 한들 그윽한 사람 향기에 비할 순 없다. 깊이 있는 사람은 묵직한 향기를 남긴다. 가까이 있을 때는 모른다. 향기의 주인이 곁을 떠날 즈음 그 사람만의 향기, 인향(人香)이 밀려온다. 사람 향기는 그리움과 같아서 만 리를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인향만리(人香萬里)라 한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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