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내 마음이 듣고 싶은 말

송담(松潭) 2016. 10. 16. 21:18

 

 

내 마음이 듣고 싶은 말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술 취해 비틀거리는 한 중년 사내가 탔다. 사내는 내 옆에 와서 앉더니 한동안 술을 견디려는 자세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떠들기 시작했다. 옆에 실제로 친구가 앉아 있다는 듯 악센트와 억양과 제스처를 쓰면서 대화를 했다. 흥분할 때는 의자 등받이나 바닥을 쿵쿵 치면서 적절하게 욕과 삿대질을 섞어가며 오로지 말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 말들은 대화가 아니라 오로지 몸 안에 있는 게 견딜 수 없어 밖으로 꺼내기 위한 말들이었다. 알코올이 몸을 괴롭히다가 소화가 안 된 안주를 끌고 입 밖으로 나오듯이 그렇게 나오는 중이었다. 오로지 자기를 견디기 위한 말이었다.

 

 내 안에도 그런 말들이 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종종 말이 나를 속이고 있음을 느낀다. 말은 끊임없이 듣는 이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그 귀에 달린 마음의 모난 부분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고, 그 마음이 이해하거나 판단하거나 계산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야 한다. 내 말은 다른 사람의 말로부터 받은 상처를 기억한다. 그래서 말이 흉기가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달래거나 단속해야 한다. 상대방의 귀가 듣고 싶은 말을 하려고 내 혀는 끊임없이 최적의 단어를 고르고 거기에 좋은 장식을 단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내 말은 아주 먹기 좋은 달콤한 아부가가 되곤 한다.

 

 상대방의 말인들 다르겠는가? 끊임없는 동상이몽이 만드는 웃음과 재치와 유머를 곁들여 헛말을 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말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왜곡되는 것을 느끼면서 그것을 참아야 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할 말 안 할 말 잘 가리기이며,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좋은 인상을 주면서 제 의도를 전달하기이며, 핵심을 잘 에두르거나 피하기이며, 필요한 한 마디의 말에 백 마디의 윤활유를 바르기이며, 결국은 많은 말을 하면서도 하나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기이다. 나는 이런 방면에 서투르지만, 단련이 전혀 안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헛말을 하는 사이, 해야 할 말은 억눌린 채 쌓인다.

 

 하루종일 말을 하고 나면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말이 하고 싶어진다. 그러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판단하거나 오해하거나 득실을 계산하는 귀가 아니라 허공처럼 그냥 다 들어줄 수 있는 가상의 귀가 있어야 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어줄 흙구덩이와 바람과 숲이 있어야 한다. 그 말은 말이되 음성이 없고 혀가 없고 발음이 없다. 그 말은 말하는 자의 감정이나 정서는 많지만 말하려는 내용은 별로 없다. 그 말은 공기를 진동시켜 작동하지 않고 몸을 진동시켜 몸 안에서 작동한다.

 

 시는 자기 자신을 위한 말이다. 내 안에는 지치고 외롭고 괴로운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는 끊임없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시는 내가 내 안의 수많은 나에게 하는 말이다. 그 말은 말로 지친 말을 쉬게 하는 말하기이며, 말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말하기이기도 하다. 내 안에서 들끓는 말을 오랫동안 숙성시키면, 말의 독기와 냄새와 상처는 맛과 향기로 변하면서 남에게 위안을 주는 참 좋은 말이 될 것이다.

 

 김기택 /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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