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유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에 관한 것이며, 또 하나는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드리는 길채비의 말씀입니다.
수형 생활 10년차의 재소자가 자살했습니다. 한밤중에 바로 옆방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운동 시간에 주은 유리 조각으로 동맥을 끊었습니다. 옆방의 자살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로서는 남한산성의 혹독한 임사체험에서부터 20년 무기징역을 살아오는 동안 수시로 고민했습니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기약 없는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가?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때문이었습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서 최대의 크기가 되었다가 맞은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갑니다.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습니다. 신문지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뜻함은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습니다.
나는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입니다. 지금도 문득문득 그 시절의 햇볕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매일 40명이 자살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매년 1개 사단 병력이 넘는 1만 5천명이 자살합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헤어나지 못하는 곤고한 삶이 그처럼 혹독한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가르치고 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습니다. 햇볕이 ‘죽지 않은’이유였다면,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이유였습니다. 여러분의 여정에 햇볕과 함께 끊임없는 성찰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이유’에 관 한 것입니다. 네덜란드 의사이며 작가인 반 에덴의 동화 <어린 요한>의 버섯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갑니다. 산책로 길섶에 버섯 군락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버섯 중 하나를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얘야, 이건 독버섯이야!”하고 가르쳐 줍니다. 독버섯이라고 지목된 버섯이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옆에 있는 친구가 그를 위로합니다. 그가 베푼 친절과 우정을 들어 절대로 독버섯이 아님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정확하게 자기를 지목하여 독버섯이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로하다 위로하다 최후로 친구가 하는 말이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였습니다. 아마 이 말이 동화의 마지막 구절이라고 기억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힘들고 먼 여정이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 ‘자유(自由)’가 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글귀를 소개합니다.
언약(言約)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처음에는 별리(別離)의 아픔을 달래는 글귀로 만든 것이지만 지금은 강의 마지막 시간에 함께 읽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한 학기 도안 수많은 언약을 강물처럼 흘려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언약들이 언젠가는 여러분의 삶의 길목에서 꽃으로 다시 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신영복 / 마지막 강의 ‘담론’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의 사막에도 별이 뜨기를'중에서 (0) | 2016.06.02 |
---|---|
운명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0) | 2016.02.12 |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떠난 노 시인 (0) | 2015.08.31 |
세월이 나를 예술가로 만든다 (0) | 2015.08.11 |
가장 고독한 사람이 (0) | 2015.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