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치유

봄에 꽃이 피는 까닭은

송담(松潭) 2015. 7. 24. 13:57

 

봄에 꽃이 피는 까닭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다

 

 

 

 “그냥 죽으려 했습니다. 내가 한참 잘못 살았다는 회한이 몰아쳐 와서 견딜 수 없었지요.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느낌이랄까.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를 견딜 수 없었던 겁니다. 사실은 그때 죽으려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 적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한겨울의 강물은 참으로 차갑더군요. 허리쯤 강물이 차오르자, 죽으려고 작정한 몸으로는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뼛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와 숨이 막힐 것 같은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나도 모르게 강물을 빠져나와서는 이다음 봄이 되어 강물이 덜 차가워지면 그때 뛰어들자고 생각했지요. 죽는 마당에 차디찬 강물 위를 둥둥 떠다니긴 싫었어요.”

 

 언젠가 그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러면서 껄껄 웃는 그를 보며 함께 웃을 수 없었다. 자살을 시도할 만큼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을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졌다.

 

 “날은 춥고 갈 길은 없고, 참으로 막막하더군요. 그때 짐승처럼 기어들어온 곳이 바로 이 집이었어요. 집이랄 것도 없었지요. 그냥 폐가로 비어있어 하루 이틀 머물다 가려 했는데 그렇게 겨울 한철을 내내 여기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전깃불도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나는 날마다 엄청난 고독과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매일 유서를 쓰는 심경으로 회한의 시를 쓰다 보니 살아갈 이유가 생기더군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현대인들에게 만남은 없고, 단순한 스침만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와의 사랑도 그런 게 아니었나 싶다며 쓸쓸히 웃었다. 그토록 죽고 못 살며 사랑을 했어도 결국엔 만남이 아니라 단순한 스침이었다고 말이다.

 

 “나는 고독을 견디지 못해서 그녀에게 의존하려 했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이다 보니 서로에게 더 많은 걸 요구하게 되었지요. 그것을 못 참고 서로를 윽박지르고 다투는 날이 많아져서, 우리는 결국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알았습니다. 혼자 있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둘이 있으면 더 외로워지는 법이라고, 결국 고독을 잘 견디는 사람이 누군가를 더 잘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지요. 이곳에 와서 맞이한 첫 번째 봄의 어느 날, 얼어붙은 땅을 안간힘을 다해 뚫고 나오려는 작은 풀잎을 보며 깨달았어요. 나는 그녀에게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정신없이 풀꽃을 바라보며 후회와 반성으로 심란해진 내 몸으로 봄볕이 떨어지더군요. 가만히 있으니 얼마나 따스하고 부드럽던지...... 봄날의 그 풀꽃이, 그 햇볕이 마치 신의 손길처럼 나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나는 이제는 저명한 작가가 되어 노년을 보내고 있는 그분의 북한강변 작업실을 이따금 떠올리곤 한다. 폐가였던 집을 허물고 다시 지은 20평 규모의 소박한 목조건물에서 그는 다시 집필에 몰두했고, 이제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삶의 공간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찾는 사람은 누구라도 절대 가볍게 생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고독한 사람은 잘 알기 때문이다.

 

 “고독을 잘 다루는 사람이 잘 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 산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든 돈이든 뭐든 상관없어요. 그런 것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알고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한테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들이니까요. 나는 늘 생각합니다. 왜 봄이 되면 꽃이 피어나는가? 그 이유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의 나에게 고독이란 이름으로 내 앞에 피어난 봄의 꽃들은 바로 나를 일으켜 세운 축복이었지요.”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좌절과 실패의 순간이 다가온다. 인생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그럴 때 새봄이 되어 다시 꽃이 필 때까지 견디고 버티는 사람임을, 나는 시인의 주름진 얼굴에 머물고 있는 안온한 웃음을 보고 다시 깨달았다.

 

 

원재훈 / ‘고독의 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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