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肉)과 술(酒)로부터의 자유
세상에 태어나 온전하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온전하게 산다는 의미는 세속의 풍파에 덜 휩쓸리고 ‘고통이 덜하면서 평온하고 행복하게 사는 삶’이라고 가정한다. 우리는 모두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태어났지만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성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기쁨, 슬픔, 분노, 고난, 위기 등 수많은 상황과 만나게 된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 갈림길에서 어떻게 선택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생이 달라진다. 인생은 운명이 30%, 선택이 70%라는 다소 막연한 데이터를 인용한 말이 있는데 어찌하였거나 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오늘의 나는 수많은 선택의 누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중요한 선택을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현명하게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삶의 수많은 영향요소 중에서 아주 단순하게 두 가지만 얘기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의 육체(몸)를 관리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몸은 성욕(性)으로 단순화한다. 성욕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으로서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나 성욕은 보통사람들은 물론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고뇌와 고통을 주는 악(惡)의 뿌리이기도 하다. 부부갈등, 이혼, 가정파괴의 시발은 거의 성적탈선이나 성적갈등에서부터 시작된다. 때문에 성적욕구를 무질서하게 해결하게 되면 반드시 인생은 꼬이고 뒤틀어질 수밖에 없다.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로 대변되는 가족윤리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억압하고 감성의 숨통을 죽이는 제도이기는 하나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제도이다. 우리는 신(神)이 아니기에 불완전하다. 이 불완전한 인간이 아무런 일탈 없이 완벽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성적(性的) 질서(秩序)를 지켜야만 생이 피곤하지 않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죄 속에서 태어난다.
육체에서는 온갖 죄가 생겨난다.
그러나 영혼이 인간의 내부에 머물러 있어서
끊임없이 육체와 투쟁한다.
인간의 삶은 모두 육체와 영혼의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 육체의 편에 서지 않고,
다시 말해 조만간 정복될 것이 분명한
육체의 편을 들지 않고 영혼의 편에 서는 사람,
생에 최후의 순간이 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조만간 반드시 승리를 차지할 것이 틀림없는
영혼의 편을 드는 사람은 행복하다.
석영중 /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중에서
다음으로 술에 대해서다.
인간관계에서 술만큼 관계형성을 잘해주는 물질은 없다. 술은 너와 나의 경계에 꽃이 피게 하고 홀로 마셔도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중독성 때문에 술 역시 관리나 통제를 잘하지 못하면 육체(성욕)와 마찬가지로 생을 힘들게 한다. 매일 술을 마시는 사람의 정신은 온전할 수 없다. 술에 취해 있거나 덜 깬 상태에서 내리는 모든 의사결정과 그에 따른 행동이 과연 정상일 수 있겠는가. 인생이 꼬이는 배경에는 거의 다 ‘술’이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한재복(실로암한의원·토마스의원 원장)은 ‘약주는 없다. 독주만 있을 뿐’이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담배보다 더 독한 것이 술이다.
술은 정신과 육체를 모두 파괴하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 대뇌피질이 마비되어 자제력과 사고력이 둔화한다.
너무 많이 마시면 해마까지 마비되어 필름이 끊기기도 하고,
이런 일이 장기간 지속하면 뇌가 쪼그라들어
기억력장애뿐만 아니라 치매로 진행될 수도 있다.
동의보감에도 주독은 구토, 발한, 딸기코, 설사를 일으키고
정신을 상하며 수명이 단축된다고 하였다.
술에 취해 성행위를 하는 것은 수명을 단축하게 한다.
인생의 행복조건으로써 육체와 술을 이야기 한 것은 이 두 문제가 내게 있어서 상당히 고뇌에 찬 문제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부터 줄곧 방황의 늪에서 나를 억압했던 음습한 육적 욕망, 그리고 가정경제를 늘 위태롭게 했던 술이었다.
이제는 내게 일탈을 꿈꾸던 에너지가 발군(?)하지 못한 것은 나이 듦에 따른 성적 에너지의 약화에 원인이 있겠지만 스스로 금욕의 미덕을 실천하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몸에 성적 에너지가 충만할 때 감성은 이성을 전복(顚覆)시킬 것이니 그 후 양심에 불쾌한 찌꺼기가 남지 않도록 해야 한다.다행히 늙어감이 나를 평화롭게 해주는 것 같다. 더욱 다행인 것은 내가 평소 낮술이나 아침 해장술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중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퇴직을 했기에 술자리도 현저히 줄었다.
이 정도면 내가 육체와 술에서 해방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생각되는데 혹자는 이렇게 지적할 것 같다. “그대가 ‘고상한 자아’를 가져서가 아니라, 오직 늙어서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늙어감의 자연스러움을 기꺼이 받아드릴 때 내생은 평화로울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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