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의 덕과 품성의 덕을 일치하라
인간이 사는 목적이 행복이라면 어떻게하면 행복해질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을 ‘덕’에서 찾습니다. 원어로 ‘아레테’라 합니다. 그는 덕이란 그 존재에 주어진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즉, 펜의 아레테는 글씨가 잘 쓰여지는 것이고, 발이 빠른 것은 발의 아레테이고, 토지가 비옥한 것은 토지의 아레테입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가진 기능, 그것은 바로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 사유’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구별짓는 기능이라고 하며, 이 이성적 사유를 극대화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최고의 덕’이라고 보았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영혼을 크게 ‘이성’을 지닌 부분과 이성이 아닌 ‘욕구’를 지닌 부분으로 나눕니다. 만약 이성의 영혼이 좋은 품성(사유의 덕)을 지녔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욕구의 영혼에 좋은 품성(품성의 덕)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절제와 인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좋은 가르침을 받고 공부를 하면 되겠지만, 절제와 인내는 실로 그 사람의 행동과 습관을 통해서 길러집니다. 이것은 결코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철저히 인위적으로 스스로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모든 품성이 곧 덕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중용과 일치하는 품성’만이 덕이 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쉽게 말하자면 양극단을 배제한 중간의 덕입니다. ‘무모’와 ‘비겁’이 양극단이라면 그 가운데 존재하는 윤리적 탁월성, 그것이 바로 중용의 덕인 ‘용기’입니다. 그러나 그 덕을 갖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훈련과 습관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중용은 그냥 ‘찬 것’, ‘더운 것’ 사이에서 ‘뜨뜻미지근한 것’을 고르는 게 아니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과 우리의 ‘품성의 덕’을 일치시키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생각이 우리의 행동을 바꾸듯이, 우리의 행동 또한 생각을 바꾼다는 것을 말입니다.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골초가 금연을 하려면 아주 죽을 맛이겠죠. 물론 머릿속으로는 계속 참아야 금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만 더 피우고 싶다는 생각에 결국 담배를 집어들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자신의 습관에 관대해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과연 담배에만 이렇게 약하고 다른 유혹에는 철저히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아니겠죠. 따라서 올바른 행위에서 올바른 습관이 생기고, 올바른 습관이 올바른 품성을 만들며, 그 품성이 바로 사람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진리를 추구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올바른 습관을 갖추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진기/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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