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를 위해 오래된 의자를 비워두자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겠습니다.
예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조병화의 <의자>라는 시입니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은 누구일까요? 예언자일지도 모르고 구세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이 마음속에 담고 있는 그분은 바로 새로운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아침은 새로운 시대가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의자는 사회적 지위, 위치, 직책 따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시의 주제는 세대교체가 되겠지요.
새로운 세대는 젊은 세대입니다. 그렇게 어린 사람에게 ‘그분’‘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 등의 존칭을 사용한 것은 자기 겸손과 새 세대에 대한 존중과 기대를 표현하기 위해서겠지요. 열심히 살았습니다. 전쟁처럼 살았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바지런 떨며 출근해서는 하루 종일 일하고 별들도 포근하게 잠자는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들을 반복하면서 마치 자동기계처럼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일한다면서 정작 가족은 포기해야만 하는 삶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그렇게 무섭게 살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그런 노력 덕분에 삶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배고픔은 없어졌습니다. 온갖 문명의 이기들을 누릴 수 있는 풍요도 얻었습니다.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자기용을 몰아보는 뿌듯함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건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지요. 어느 나라 어느 세대에서도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이뤄내지 못했던 일을 우리의 선배들이, 그리고 우리들이 해냈습니다. 스스로도 대견한 일입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다시피 하여 얻은 성과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줄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겸허하게 ‘그분’을 위해 묵은 의자를 비워드리겠다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침을 몰고 오는’ 그분이 아직도 어둠의 미망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들이 아직도 어둠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지를 헤아리는 어른들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일어났던 의자에 슬그머니 다시 앉으려고만 할 뿐입니다.
그 어둠이 전적으로 어른들 탓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어른들은 그 어둠을 모른 척합니다. 와야 할 ‘그분’이 왜 오지 않는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저 모른 척하면서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에게서 예전과 같은 패기와 열정이 사라졌다고 혀를 찹니다. 그럴 법도 합니다. 자신들이 그 나이 때는 물 불 가리지 않고 뛰었으니까요. 맨 땅에 헤딩하듯 뜨겁게 살았습니다. 독재에도 항거했고 삶의 전투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가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주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그게 정말 그들의 탓일까요?
그들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든 이 세상을 만든 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껏 숨쉬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바로 우리 자식들입니다. 우리는 어렵고 가난한게 살았습니다. 그래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어서 버텼습니다. 지금 당장은 손에 쥔 것이 없어도 졸업해서 취업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대시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처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전혀 가늠할 수 없으니 어떻게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다가가 함께 살자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자신의 고치 속에서 웅크리고 있습니다. 결혼은커녕 교제조차도 버렸습니다. 왜 그들이라고 사랑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칫 헛된 꿈이기에 일찌감치 포기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사랑의 포기라니요! 그것은 죽은 삶입니다. 지금 저에게 그런 삶을 살라고 하면 아무리 젊어진다 해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 젊은이들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아픔을 정작 어른들이 모릅니다. 아니 모른 척합니다. 어른들이라고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나 최소한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건 의무입니다. 그것이 바로 ‘빈 의자’입니다. 그냥 앉아 있던 자리 내주는 게 아니라 앉아야 할 자리를 만들고 찾아야지요. 그런데도 ‘아침을 몰고 오지’않는다고 탓합니다.
이 두 세대에는 인식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현재는 힘들어도 미래는 좀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이루었고 누렸습니다. 그러니까 빈곤에서 풍요로 진행하는 삶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의 젊은이들은 풍요 속에 나고 자랐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냉혹하고 미래는 빈곤합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집에는 자가용이 있었지만 정작 제 돈 벌어 자신의 자동차를 갖게 될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희망이나 믿음은 거짓 선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역사와 문명은 발전합니다. 그리고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은 제 자식들에게 나은 삶을 살아갈 바탕을 마련해주는 게 어렵지 않겠지요. 바늘구멍 같다는 취업의 문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은 여전히 행복하고 멋진 미래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그런 그들이 좌지우지하는 정책이나 대책이라는 건 정작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며 아침을 몰고 오지 못하는 ‘그분’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입니다. 나는 풍요를 누렸으면서 자식들에게는 절망과 좌절과 분노만을 남겨준다면 부끄럽고 무의미한 삶일 뿐이지요.
‘그분’이 많이 아파합니다. 낡아빠진 의자에 눙치고* 있기보다는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연대와 의무가 바로 우리들의 몫입니다. 어른답게 살아야겠습니다. 절망을 물려줄 수는 없으니까요. 수수방관하면서 혀만 차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다가가 껴안아주고 일으켜주며 때로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편에 서서 싸우기도 해야겠지요.
어른 되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 되는 일은 어렵지만 그러나 행복한 의무입니다.
김경집 / ‘마흔이후 이제야 알게 된 것들’중에서
* 눙치다 : 문제삼지 않고 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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