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도 삶의 일부일 뿐이다
최근에 나의 눈길을 끈 신간 도서의 흐름은 ‘아픔’에 대한 강조다. 이 시대의 세상 전체를 피로사회로 규정하는 책도 있고, 청춘은 본래 아픈 시절이라고 좌절감이 큰 청년층을 위로하려는 책도 있다. 중년의 마음을 끌기 위한 어떤 책은 ‘마흔은 아플 수도 없는 아픔’이 있는 큰 버거움을 안고 산다고 자극한다
청춘이건 중년이건 세상이건, 그만큼 피로하고 그만큼 내상(內傷)을 안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일까? 청년실업과 저임금, 비정규직 취업구조 속에서 삶을 시작해야 하는 청춘, 뜻하지 않게 조직을 떠날 수도 있는 상시 위험의 구조 속에서 삶과 가족을 걱정해야 하는 중년을 생각하면 아픔이 부각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숲과 자연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그 지혜를 세상과 나누며 살고 있는 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스스로를 아픈 시대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을 염려하게 된다. 몸이 겪는 병도 너무 아픔을 크게 받아들일 경우 몸을 추슬러 다시 생기를 되찾는 것을 오히려 늦추거나 방해하듯, 시대적 정신적 통증 역시 지나치게 강조되고 확산되는 것은 우리를 더욱 무기력하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된다.
나는 오히려 아픔이 삶의 일부임을 강조하고 싶다. 삶 전체에 희로애락이 순서를 두지 않고 찾아들고 섞이고 또 반복하듯, 아픔 역시 전체 삶의 어느 국면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을 인정하자 말하고 싶다. 역사 역시 그 흐름이 섞이고 다시 반복되는 것이니 찾아든 아픔을 전부로 여겨 그 앞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권하고 싶다. 나의 역설은 숲에서 살아가는 나무와 풀의 삶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단호하게 표현하면 그것이 곧 자연의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내가 사는 여우숲은 아주 오래 전에 산사태가 있었던 곳이다. 산의 한쪽 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때, 크고 작은 바위와 돌도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지금은 무너진 산의 사면이 모두 천이(遷移)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나무와 풀로 복원되었고 마침내 숲을 이루었지만 표면에는 정상에서 흘러내린 바위와 돌이 가파름을 지탱하고 있는 형상을 보이는 숲이다.
상상해 보라! 여우숲처럼 바위와 돌이 많은 산에서 삶을 시작해야 하는 개별 식물의 삶은 어떨까? 태어날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생명은 하나도 없다. 삶은 오직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짐승도 식물도 모두 마찬가지다. 더욱이 식물은 태어난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스스로 움직일 수조차 없다. 광합성이라는 획기적인 능력을 가져 스스로 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재주를 선물로 받은 대신, 오직 태어난 자리에서 제 하늘을 열고 꽃피워야 한다는 형벌도 함께 받은 생명이 식물이다.
바위와 돌이 많은 지형인 이곳에서 삶을 시작한 여우숲의 나무들, 특히 바위 위에서 발아한 나무들은 모두 바위를 끌어안거나 바위를 뚫는 방법밖에는 삶을 지탱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모두 숲의 주인이 되었다. 지금 이 숲의 신록은 모두 그들이 아픔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결과다.
그렇다. 나만 아프고 인간만 아픈 것이 아니다. 내게만 결핍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픔과 결핍은 생명 모두에게 주어지는 신의 형벌인지도 모른다. 가없이 나약한 생명이 바로 우리 인간이니 어쩌겠는가? 아파하자, 그러나 주저앉지는 않기로 하자!
김용규 / ‘숲학교 오래된 미래’교장
(2012.5.31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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