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사막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채널을 돌리다가 <동물의 왕국>을 발견했다. 사자 무리가 나왔다. 수사자의 일생을 다룬 내용이었다.
수사자 두 마리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가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가족을 이끌던 다른 수사자들과 혈투를 벌이고, 그들을 쫓아내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 새끼들을 전부 물어 죽이는 건 좀 심했다. 맹수라 그렇다지만 지나친 것 아닐까.
내레이터가 건조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새끼들을 그냥 두면 암컷들이 교미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사자들로선 번식 본능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라고. 가족을 얻은 수사자 두 마리는 전성기를 누린다. 호흡을 맞춰 사냥을 하고 암컷들과 새끼들을 배불리 먹여 살린다. 하이에나 같은 위험한 무리로부터 새끼들을 지킨다.
그러나 그 전성기는 매우 짧고 허무하게 끝난다. 2~3년에 불과하다. 다른 떠돌이 수사자들과 대결에서 패배해 쫓겨난다. 멀리서 새끼들이 죽임을 당하는 소리를 들으며, 다리를 절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떠나고 만다. 그렇게 다시 방랑이 시작된다. 그 와중에 대개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그는 자신이 수사자와 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냥을 해서 가족을 먹이고 안전하게 지켜주지만, 가족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존재. 그러니까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이방인 같은 존재 말이다.
중년 남자의 자리는 모든 면에서 위태롭다. 회사에서는 성공한 상사와 치고 올라오는 후배 틈에 끼어 샌드위치 신세다. 사나운 수사자들로부터 언제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불안하다. 차장이니 부장이니 승진을 해도, 잘나가는 친구들에 비하면 여전히 초라한 모습이다. 남들 앞에선 당당하게 보이려고 애쓰지만, 혼자 있을 때는 엄습해오는 열등감과 좌절감을 주체하기 힘들다. 남들은 다 성공했는데 나만 실패한 인생을 사는 기분.
주택 대출금은 아무리 갚아도 끝이 없고, 아이 교육비는 자고 나면 두 배씩 오른다. 부모님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 부모님과 아내 사이에서도 샌드위치 신세가 된 지 오래다. 요즘 심정으론 양쪽이 다 원망스럽다. 힘들어 죽겠는데 제각각 서운한 감정만 앞세운다. 그래서, 나더러 어떡하라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때도 있지만 그걸 표현할 수 없어 외롭다.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된 건, 혹시 내 공간이 없어졌을 때부터가 아닐까. 자기만의 공간이 있어야 생각이 비로소 숨을 쉰다는 말도 있잖아.’
현대인에게도 사막이 필요하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기분이 울적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외로움에 빠졌을 때는 사막에 들어가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요즘 뜨는 광고.
사막과 마음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히브리어로 사막은 ‘미드바르 midbar'라고 한다. 그 어원은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 기독교 초기 가르침과 깨달음이 ‘사막의 고독’에 나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상복 /‘지금 외롭다면 잘되고 있는 것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