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하나’를 향한 영원한 갈망

송담(松潭) 2012. 2. 2. 13:44

 

하나를 향한 영원한 갈망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BC427~347)은 그의 명저 향연에서 인간이 평생 겪어야 하는 사랑을 신화적으로 해명했다. 태초에 인간은 둘이 하나를 이룬 모습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오만은 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제우스는 불경죄를 저지른 인간을 벌하기 위해 이들을 둘로 나누어버린다. 본래 한 몸이었던 인간들은 제우스의 벌로 둘로 나뉘었고 그래서 인간은 애초부터 자신의 반쪽을 찾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과정이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 일체성에 대한 욕망, 이것이 향연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이란 각자의 길을 걷던 두 사람이 만나 두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처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원하게 만든다.

 

 플라톤의 신화는 현대에도 살아 있다. 여전히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합을 통해 완전한 하나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결여와 불완전이 회복되는 치유이자 구원이다. 때로 우리는 그 구원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 사랑에서 어떤 힘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 꼬마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영혼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랑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이 하나되려는 사랑은 상승과 완성의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흡수해서 내 안에 가두는 사랑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리가 불완전한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사랑에 도달하고도 완전한 행복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은 사랑이 반쪽의 몸을 찾는 과정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나의 것이었던 나머지 조각을 찾아 채우는 식의 사랑이라면 결국 타자를 내 안으로 흡수해서 무화(無化)시켜버리는 과정에 지나지 않게 된다.

 

 흡수와 통합이 끝난다는 것은 제우스의 분노에 보상이 이루어지고 내 안의 결여가 충족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후의 결과는 모든 이들에게 자명하게 나타난다. 타자를 흡수한 뒤의 나는 타자를 흡수하고자 했던 때의 열정을 잃고 상승의 충동을 상실한다. 결여는 매워졌지만 나를 움직이는 추동의 에너지가 사라진다.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내 몸의 반쪽은 더 이상 기대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영혼의 반쪽이 아니라 내가 짊어져야할 내 몸의 잉여일 뿐이다.

 

 내 안으로 타자를 흡수해버리는 사랑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타자는 내 안에 흡수된 후에 결국 나에게 아무런 자극도 될 수 없는 내 몸의 일부, 내 감정의 일부가 돼버린다. 인격을 가진 유일한 존재였던 타자는 내 안에서 무덤처럼 고요히 가라앉는다. 상승을 위한 다른 대상을 만나기 전까지 상대는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가 새로운 무덤 아래 묻혀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다만 묻히는 것이다.

 

김선희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