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정신분석학의 근본 전제를 아시나요? 정신분석학은 인간을 위대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기본적으로 ‘미숙아’로 태어난 존재로 봅니다. 새끼가 태어날 때 초식동물은 한두 시간 안에 일어나서 걷지만 갓난아이는 혼자 걸을 수도, 혼자서 먹을 수도 없습니다. 최소 몇 년 동안 부모의 보살핌이 없다면, 간난아이는 생존하기도 힘듭니다. 어쩌면 간난아이가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 다시 말해 사랑받으려는 충동이 이로부터 기원할지도 모릅니다. 유년 시절의 이런 충동이 성숙한 인간에게도 집요하게 남아 있게 됩니다.
아이는 성기를 만지면서 쾌락을 느끼는 시기를 거칩니다. 그러나 부모가 금지하면 아이는 성기와 관련된 자기성애적인 쾌락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때 아이의 성기는 욕망의 대상이 되고, 마침내 아이는 욕망의 주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욕망의 주체는 금지를 수용하지만, 동시에 금지된 것을 욕망하면서 탄생한다는 겁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금지된 욕망의 대상을 ‘대상a'라고 하는데 ‘대상a는 ’잃어버린 쾌락‘이자 주체가 집요하게 회복하려는 상실된 쾌락의 잉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아이가 꿀을 먹고 쾌락을 느꼈지만 부모가 이를 금지했다면 이 아이가 어른이 되어 욕망하는 음식은 대부분 금지된 꿀, 즉 ‘대상a'의 아우라를 가진 것이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부모의 반대로 헤어졌다면 두 사람에게 상대방은 ‘대상a'로 남아서 장차 그들의 사랑을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 만난 이성이 과거 금지된 애인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면, 그 상대와 사랑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a'는 마치 그림자처럼 주체를 따라다니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것은 그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 즉 ‘대상a'를 이해하는 겁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타자를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입니다. 과연 나의 욕망을 지배하는 ‘대상a'는 무엇일까요.
프로이트에게 인간의 정신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그나마 존재했지만, 라캉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든지 정신병, 신경증, 도착증이란 세 가지 임상 구조 중 하나에는 반드시 속하기 때문입니다. 세 임상 구조 중 빈도수로 보면, 정신병과 도착증은 매우 적은 사람에게서 나타나기 때문에 진짜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로 일컬어지고, 그 중 신경증에 대해서는 사람은 대부분 신경증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그것을 정상이라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라캉에 따르면 신경증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대부분의 남성을 지배하는 강박증,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을 지배하는 히스테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남성은 상대방에게서 금지된 욕망의 대상, 즉 ‘대상a'만을 찾습니다. 물론 과거 쾌락의 흔적으로서 ‘대상a'는 상대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대방에게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남성은 상대방 여성에게 투사된 ‘대상a'만을 그녀에게서 추구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에게 여성은 그녀만의 고유한 욕망을 가진 주체로 여겨질 수가 없지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임상적으로 평이하게 소개한 핑크는 성관계를 맺을 때 강박증자, 즉 남성에게 여성은 ‘대상a'의 우연적인 용기나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당연히 남성에게 여성은 대체 가능하고 교환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또한 라캉은 “남자에게 여성은 어머니 아니면 매춘부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지요. 그러니까 남성에게 여성이란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이 없는 존재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강박증자에게 중요한 것이 자신의 욕망이었다면, 히스테리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반대로 타자의 욕망입니다. 히스테리 구조를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여성은 상대방 남성이 욕망하는 대상, 즉 ‘대상a'가 되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상대방 남성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려는 노력 자체는 여성의 실존에서 갈등 요인으로 기능하게 될 겁니다.
가부장제는 과거 농경사회의 정치경제학적 구조로부터 더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력에서 더 우월한 남자가 중요했던 까닭에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자아이는 남동생이나 오빠에 비해 부모로부터 사랑을 덜 받는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여자아이는 부모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부모가 사랑할 만한 대상이 되려고 집요하게 노력할 것입니다. 어머니의 일을 도와준다든가, 아니면 집안 정리를 하면서 말이지요. 마구 어질러놓는 남동생이나 오빠에 비해 여자아이가 부모에게 더 성숙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부모의 욕망을 읽고 그것에 자신을 맞추니까 그런 착시 효과가 생기는 겁니다. 여자아이의 조숙함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숙이라기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본능적인 전략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런 유년 시절의 모습이 성장한 여성에게서 히스테리로 반복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히스테리와 강박증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을 때에만 가능한 겁니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완전히 맞추려 하지 말고, 동시에 자신의 욕망에만 매몰되지도 말아야 합니다. 같은 말이지만 우리는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동시에 긍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사랑이란 위태로운 감정에 잠시라도 머물 수 있는 법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위태로운 줄타기에 숙달되지 않는다면 남성은 강박증 쪽으로, 여성은 히스테리 쪽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니 노력해야만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와 타자 사이에서 아찔한 균형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평지를 걷듯이 사랑의 줄타기가 편해질 때가 올 겁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마침내 남성이라면 강박증을, 여성이라면 히스테리를 극복하게 될 겁니다.
강신주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중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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