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성의 존재론을 위하여
사랑은 ‘마주침’이전에 결정되어 있는 숙명적인, 혹은 필연적인 것일까? 아니면 사랑은 마주침이 일어난 뒤에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즉, 필연성이 우선적인가? 아니면 우발성이 우선적인가? 2,000여 년 전 서양 철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대부분 주류 철학자들은 전자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렇지만 현대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후자를 지지한다. 지금은 우발성이 필연성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고 그 중심부에 들뢰즈(1925~1995)라는 철학자가 있다.
우선 들뢰즈는 우리의 사유를 두 가지 이미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나무(tree)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리좀(rhizome,뿌리줄기) 이미지이다. 나무는 땅에 굳건히 뿌리를 박고 서서 무성한 가지와 잎들을 지탱한다.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가지와 잎들에 앞서 존재하는 절대적인 토대, 즉 절대적인 의미이자 필연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뿌리와 줄기로 구성된 나무 이미지를 아버지와 아들의 구조로 이루어진 친자 관계에 비유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없다면 아들은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관계에서 절대적 의미를 지닌 것은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좀은 어떻게 활동하는가? 리좀은 땅속에서 부단히 증식하면서 다른 뿌리줄기와 마주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연서 온갖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식물을 의미한다. 리좀의 활동이 새로운 마주침과 다양한 유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남녀가 마주쳐서 맺어지는 것과 같은 결연 관계에 그것을 비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리좀은 새로운 타자나 사건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에 확고한 뿌리가 없다고 해서 결코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괴로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지금과는 또 다른 사람, 혹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축복 말이다. 어쨌든 앞으로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마주침과 사건들로 우리의 삶이 새롭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다시 물어보자. 사랑은 숙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발적인 마주침에 의존하는가? 사랑을 숙명적으로 본다는 것은 나무의 이미지를 따른다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10년 동안 매주 토요일 떠나간 여인을 기다릴 수 있는 아름드리 고목과도 같은 삶, 확신에 가득 차 있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가 오지 않더라도, 아니 오기 전에 내가 죽더라도, 그 사람은 나의 사랑이야”
반면 사랑을 우발적인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들뢰즈가 제안했던 리좀의 이미지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는 여행을 계속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서, 자신의 기쁨이 지속되는 한 그 사람과의 마주침은 끈덕지게 지속하게 될 것이다. 물론 기쁨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한때 기쁨을 주었던 그 사람에게 결별을 고하게 될 것이다. “굳바이!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날 거야! 너도 좋은 사람과 만났으면 좋겠어.”
강신주 / ‘철학이 필요한 시간’중에서 발췌정리(일부 생략, 연결)
< 독자 생각 >
1.
헤어짐의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들뢰즈의 리좀이론(사랑을 우발성으로 봄)에 입각하여 살면
상당한 자기위안 또는 삶의 지혜가 될 것 같습니다.
2.
그러나 사랑, 즉 남녀의 만남을 너무 자유분방하게만 생각한다면
신뢰와 책임이 없어 가정관계에 불안을 초래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3.
하지만 현대는 갈수록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고 사랑에 있어서도 이와 같으니
쿨하게 사는 골드미스 등등이 많아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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